by
Francis Lee
Sep 29. 2024
21.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길
나도 나를 모른다.
혜담 스님은 소속이 없었다. 그래서 굳이 ‘스님처럼’ 다비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화장을 하고 분골을 거치지 않고 뼈만 수습해서 암자 근처에 땅을 파서 묻었다. 그 모든 일을 나 혼자 처리했다. 순수 화장 비용은 100만 원 남짓 들었다. 거주지가 없으니 관외자로 처리해 비용이 좀 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혜담 스님의 말대로 하자면 800만 원을 더 써야 하는데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유골을 매장하면 얼추 800만 원 정도 드니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매장을 할 생각도 잠깐 했지만, 그의 유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암자 근처에 묻어주고 남은 돈은 모두 붉은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작은 나무 상자에 담아 그의 유골과 함께 묻었다. 문자 그대로 노잣돈으로 쓰라고 말이다. 이승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아니면 내 바람대로 이제는 그 모진 인연법을 벗어나 부처님 곁으로 갔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이 없는 ‘그곳’으로 갔으니 다시는 ‘이곳’으로 다시 건너오지 말기만 바랄 뿐이었다.
이제 나는 다시 혼자 남았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혼자였다. 첫째 아이도 낯설었고 남편도 늘 뭔가 서먹했다. 그런 와중에 만난 혜담 스님은 나의 영혼의 위로자가 되었지만 이렇게 인연을 맺은 지 1년여 만에 영원히 가버렸다. 그 어떤 구체적인 가르침도 주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머문 암자에 있던 작은 궤짝을 열어보니 바랑과 죽비 그리고 발우만 있었다. 그런데 그 물건들을 들어내 보니 바닥에 종이 한 뭉텅이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원고 뭉치였다.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내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갈 리가 없지...”
그래서 급한 마음에 그 원고들을 들추어 보았다. 그런데 아무 글씨도 안 보였다. 그냥 빈 종이였다. 매우 실망하여 계속 들추어 보니 맨 밑에 놓인 몇 장에 글이 담겨 있었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그 글은 “보살님, 아니 어머님 보세요...”로 시작되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떤 우연한 이유든지 만들면 필연이 되고 필연은 인연이 되는 법이다. 어차피 이 세상의 삶은 무상한 것이고 시간 속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은 더 안타깝고 그래서 추억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 추억은 마음을 시리게 할수록 시간과 더불어 오히려 더 진해지고 생생해지는 법이다. 비록 1년여의 인연이지만 혜담 스님과의 ‘일’이 만들어 낸 추억은 내게 그런 의미가 되었다. 남의 눈에 어찌 보이든 강한 확신으로 혜담 스님은 전생에 함께 죽은 내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이승에서 다시 만난 나에게 내가 갈 길을 간결하게 알려주었다. 다만 그 안내가 너무 짧았기에 아쉬웠다. 그런데 이렇게 내게 더 할 이야기를 남긴 것이다. 마치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 글은 서두에 어울리게 편지체로 쓰여 있었다.
“제가 이승에 다녀간 이유를 찾은 기쁨도 잠시, 저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커져 있었습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살님을 만난 때 이미 저는 혈액암 3기 진단을 받은 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계획한 것보다 좀 더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살님께 충분한 설명을 드리고 전생에 못다 한 회포를 천천히 풀고 싶었지만 저의 업보로 인연이 이리 마무리 된 것입니다. 아쉬울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는 일입니다. 다 인연법에 따른 것이니까요. 물론 이승에 남은 사람은 인간의 정에 흔들리니 아쉬움이 남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다 흩어지는 구름과 같은 허상일 뿐입니다.”
누가 모르나? 삶 자체가 슬픔인 것을? 다만 그 사실을 알면서, 삶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야만 하는 모진 목숨이 안타까울 뿐이지. 그러나 인간의 탈을 쓰고 이승에서 숨을 쉬어야만 하는 존재이니 다른 방도가 없다. 득도라도 해서 육신이라는 허물을 이승에서 벗어낼 방법이 없는 바에야 어쩔 것인가? 슬퍼하고 아쉬워하면서도 그런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면 그만이다. 내가 슬프다는 자각을 하고 본연의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슬픔에 휘둘릴 일은 없지 않은가? 무념무상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겠지만 그 근처에는 언젠가 이르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말고 다시 글을 읽었다.
“제가 전생에 못 푼 한을 이승에서 풀고 가니 아쉬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먼저 탯줄이 끊어지기도 전에 엄마 가슴에 올라가 누우면서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듣는 법입니다. 그러다가 엄마의 젖을 처음 빨게 되고요. 그런데 소승은 전생에서 그런 것조차 못하고 바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한을 이번에 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경우와 달리 그렇게 보살님을 어머니처럼 대하면서 보살님을 14세부터 괴롭혀 온 마귀를 제 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제가 암에 걸린 몸을 지녔으니 마귀가 들어온들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보살님도 잘 아시는 지중해의 성인 다스칼로스의 방편을 저도 사용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다스칼로스와는 달리 저는 제 몸에 들어온 마귀가 도로 달아나지 않도록 정신으로 몸을 다스리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아주 강한 마귀라서 힘든 싸움이었지만 결국 제가 기거하던 암자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혜담 스님이 내게 한 치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그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1995년 사망한 다스칼로스는 내가 탐독한 뉴에이지 사상가 가운데 특히 맘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추종자가 말하는 대로 그가 진짜 성자였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를 반대하는 이들, 특히 기성 종교 측으로부터는 악마적인 주술을 부리는 마법사라는 비난까지 받은 사람 아닌가? 게다가 인간을 육체와 심령체와 이지체가 합쳐진 존재로 이해하는 그만의 독특한 인간관은 정통 기독교 교리를 잣대로 볼 때 이단적 요소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런 고리타분한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많은 사람의 병을 치유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치유 방법이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도 중요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치유했다고 교만을 떨지 않은 것이다. 그는 환자의 병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치유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하며 치유하는 것이다. 그런 아픈 몸을 이끌고도 다스칼로스는 83세로 상당히 오래 살았다. 죽는 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치유한 그의 인생 역정은 문자 그대로 예수의 삶을 실천한 것으로만 보이지 않나? 그런데 혜담 스님은 60을 넘기지 못하고 피안의 세계로 갔다. 내 몸에 깃들었던 악귀가 그 정도로 악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과연 그 악귀는 무엇이었을까?
“이제 소승의 몸으로 가져간 악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보살님과 저는 오래전부터 그 악귀와 싸움을 벌여온 장수였습니다. 마치 가톨릭의 미카엘 천사를 앞장세운 칠 천사처럼 함께 악귀에 맞서 싸운 장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님이 아시는 것처럼 이 싸움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한 신의 최종적인 승리가 있기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님이 어찌 기독교의 천사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칠 천사라면 유대교와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서도 말하는 미카엘 대천사와 나머지 우리엘, 라구엘, 라파엘, 사리엘, 가브리엘, 레미엘 천사를 의미한다. 말세가 오면 신의 영광을 위해 미카엘 천사가 악마와 맞서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이미 유대교에서 주장한 지 오래된 이야기다. 그가 가장 으뜸가는 천사 곧 대천사이기에 악과의 싸움에서 최선두에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마는 사탄이다. 혜담 스님도 그 악마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미카엘 대천사의 군대에 혜담 스님과 나도 속했다는 말인가? 그런 장수로 마귀와 맞서 싸우다니?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사탄은 누구인가?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죄와 악으로 이끄는 존재다. 유대교의 전통에서 사탄은 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지닌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을 악으로 그리고 죄로 이끈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사탄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보살님이 잘 아시는 것처럼 마귀는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 영원한 평화가 깃든 피안으로 이르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그 세계로 건너가지 못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세상에 나와 집착에 따른 고통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 가운데 어떤 이들은 악귀와 맞선 싸움에 나서서 인간이 윤회의 고리를 끊는데 도움을 주도록 정해진 운명을 따르게 됩니다. 이른바 보살행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운명이 주어진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인연이 이어지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로 고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오해를 더 많이 받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말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고난이 지속됩니다. 보살님이 14살부터 겪은 고난도 이런 인연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보살님의 속마음과는 달리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보살님이 이상한 분으로 보이게 됩니다. 내적인 영적 투쟁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자기 안에만 갇혀 있어 보이는 법이니까요.”
내 고통의 근본 원인이 악귀와의 싸움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그 말을 누가 쉽게 이해해 줄 것인가? 그렇다면 14살부터 나를 괴롭혀 온 친구, 직장 동료, 가족, 시댁, 그리고 심지어 내 아이가 모두 악귀의 하수인이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
“물론 보살님을 괴롭힌 그 사람들이 악귀는 아닙니다. 악귀의 작용으로 보살님이 악과의 싸움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일에 협력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행동이 그들의 자의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선한 마음과 더불어 악으로 기우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귀가 작용하면 그에 동조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 특히 내가 낳은 아이까지 그런 일에 도구로 삼아야 했다는 말인가? 내가 뭐 대단한 존재라고 그토록 질기게 괴롭힌다는 말인가? 악과 맞서는 군대에서 한낱 장수에 불과한 나를 말이다. 수만, 아니 수십만의 군대 안에 들어가면 잘 보이지도 않는 존재 아닌가?
“악은 안개와도 같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널리 인간 세계에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인간의 영혼을 차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인간은 자신이 악에 물들었다는 자각을 전혀 하지 못하면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선악의 구분이 없고 너와 나의 구분이 없지만 이 세상은 분명히 선과 악의 싸움터입니다. 조로아스터교만이 아니라 많은 종교와 사상에서 선과 악의 싸움은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왔습니다.”
혜담 스님은 불교의 승려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식의 생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악과 맞서는 군대에 속한 장수로서 다른 군인들과 더불어 싸움을 벌여야 하지만 보살님과 소승은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별도의 군대를 조직하여 특정한 악귀와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별동대가 된 것입니다. 보살님은 악마, 악귀, 그리고 근본적으로 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답을 찾으려는 나에게 도리어 질문을 하다니? 악마와 악귀? 결국 유대교에서 말하는 사탄과 고대 그리스에서 말하는 디아볼로스 아닌가? 다만 불교에서 따로 마라로 부르기도 하지만 결국 다 같은 것이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마라, 곧 파피야스는 원래 선한 인간이었다가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악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이 욕망에 물들고 감각적 쾌락에 빠지도록 이끌고 그 계략에 넘어간 인간이 많아질수록 기뻐하게 된다. 불교 교리에 따르면 이 파피야스는 부처를 극도로 싫어한다. 부처의 가르침 대로 인간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집착에서 벗어나면 파피야스의 세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피야스는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 이승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살아 숨 쉬는 동안 욕망을 버릴 수 없기 않은가? 그러니 여유만만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즐기고 쾌락을 누리라는 악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차피 한평생인데 잘 먹고 잘 살다가 죽고 싶은 것이 인지 상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내가 잘 먹고 잘 살려면 누군가의 희생을 이용해야 하고, 그러자면 세상의 고통을 더해야 하니 악은 세상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고 악과 맞서 싸우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파피야스가 부처님마저도 능멸하려고 했던 사실을 보살님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유혹할 때 매우 겸손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자로 다가왔습니다. 우린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악귀는 선한 모습을 하고도 나타나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식별이 매우 중요합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혜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혜안을 얻기 위한 용맹정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데 누구의 도움도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서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보살님, 아니 어머니. 이제 그 길을 혼자서 가셔야 합니다. 외롭고 힘들더라도 보살님이 이승을 다녀간 이유를 찾고 업을 끊는 방법을 알아내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성불하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피안의 세계에서 뵙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이것이 혜담 스님의 편지 내용의 전부이다.
내가 그동안 읽은 그 많은 종교 서적 심지어 뉴에이지 서적까지 혜담 스님도 다 읽었다는 말인가? 마치 둘이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밝혀졌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방편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인가? 남편과 아이는? 특히 돌도 안 지난 둘째,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과는 어떤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을 나 혼자 찾아야 한다. 과연 내가 그 길을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전혀 없는 데도 말이다. 무소의 뿔?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아직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전혀 모르는 데 말이다. 그러나 운명이 나를 이끄는 대로 가야 하겠지만 그 길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험난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그 길을 갈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 그 길의 시작점에 선 나는 정말로 너무 무지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 운명인 것을.
이런 상황에서 법정 스님의 책에 인용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 말고.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
혹은 쾌락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