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33살 무렵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난번에 말한 대로 예수가 정확히 몇 월 며칠에 태어나서 몇 월 며칠에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수가 태어난 동네로 알려진 베들레헴도 지리적으로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라 대강의 시간과 장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가 탄생한 날짜와 죽은 날짜도 교파에 따라 다르게 기념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33살에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해도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은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평균 연령은 40세 정도였다. 이에 비추어본다면 예수는 장년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남성은 18세 여성은 13세가 되면 통상적으로 혼인을 하였다. 유대인들은 야훼 신의 명령대로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어 번성하여 바닷가의 모래알과 하늘의 별만큼 그 인구를 늘리는 것을 지상명령으로 여긴 민족이었다. 그 당시 33살의 유대인이면 자식의 혼인을 서서히 준비할 나이였다. 그 나이에 예수는 혼인과는 무관한 삶을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잘 살다가 잘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삶이 가장 모범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를 믿을 뿐 예수처럼 사는 것을 꺼린다. 단순히 그 삶이 비참한 죽음으로 끝나서가 아니다. 삶 자체가 신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흔히 사람들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혼인하여 무병장수하다가 많은 자손을 남기고 여러 사람들의 애도 속에 잘 죽어 후한 장례식을 치른 후에 좋은 땅에 묻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조건 가운데 단 한 가지도 충족하지 못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모가 혼인을 서로 약속하게 되면 1년 정도 약혼 기간을 가지게 된다. 이 시기에 대부분 부모들은 흥정을 한다. 신랑 측에서 신부를 ‘데려가는’ 대가로 치르는 지참금이 있는 데 이를 놓고 밀고 당기는 협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신부 측에서는 ‘일꾼’이 없어지는 것이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시 유대지방은 노동집약적인 농경이 주업이었으니 가족은 곧 노동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장가를 가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일부다처 제도를 유지하였는데 대부분 부자들만이 여러 아내를 거느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예수는 무척 가난했다. 그래서 이 지참금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장년에 해당되는 30살 무렵에 집을 나가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으니 재산을 쌓을 일은 더 없었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이 집 저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곤 하였다. 가정이 없었다. 성경 마가복음 3장 31절에 보면 예수가 사람들과 모여 있는 자리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찾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누군가가 예수에게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밖에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자 예수는 신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형제자매이고 어머니라는 대답을 한다. 예수는 혈연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서는 매우 낯선 대답이었다. 그들은 부모의 대를 잇는 것이 신의 지상명령으로 여기던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어머니와 형제자매를 등한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가 사형을 당하는 순간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그의 곁을 지켰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는 물론 그의 핵심 제자들도 그가 사형을 당한다는 소식에 모두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에도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형제로 알려진 야곱은 예수 공동체에 계속 머문다. 비록 혈연관계는 부인했지만 그들과의 관계를 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예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길에서 태어나 자란다음 장가도 못 가고 중년이 다된 30살 무렵에 친척인 세례자 요한을 따라 말하자면 ‘출가’를 하여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무리들과 1년 내지 3년 정도 함께 지내며 돈 한 푼 모으지 못하고 후손도 남기지 않은 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존재이다. 그 당시 ‘보통’ 유대인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다. 그 당시 예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없을 만도 한 일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인류의 3분의 1 정도가 그를 ‘믿고’ 그의 삶을 ‘칭송’한다. 그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살기’는 매우 꺼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인류의 나머지 3분의 2 가운데 많은 이들도 그를 믿지는 않아도 적어도 매우 훌륭한 분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간디도 예수에 대하여 그와 같은 의사를 나타낸 적이 있다. 자신은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지만 예수는 존경한다고 말이다. 구체적으로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유명한 존스(Stanley Jones, 1884-1973)는 간디를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기독교를 권하였다. “마하트마 간디, 저는 인도에서 기독교가 생활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외국사람 또는 외국 정부와 동일시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루빨리 기독교가 인도인의 삶의 일부가 되고, 인도의 정신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인도를 구원하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간디, '오늘부터 예수처럼 사십시오.” 그러자 간디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런 말을 하고 싶군요. 우선 여러분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이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스탠리 저, 김상근 역,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에서 인용) 그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처럼 살기를 무척 꺼렸던 것 같다. 예수를 그토록 간절히 믿으면서 그리고 남들 보고는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들은 예수를 따라 살지는 않는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예수는 뭔가 잘 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그때나 이제나 그를 믿는다고 하면서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 정작 예수가 살았던 그 삶 그대로 따라 사는 사람이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가 말이다.
그런데 잘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죽을 때 후회 없는 사람 곧 잘 죽는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잘 사는 법에 대한 논의는 잘 죽는 법과 직결된다. 그래서 중세에는 ars moriendi, 곧 잘 죽는 법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 이 문서는 15세기 초중반 독일 남부에서 처음으로 작성된 것이다. 그 저술의 직접적인 동기는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쓸며 약 1억 명의 사망자를 낳은 흑사병과 그 후유증이다. 그래서 이 문서는 이 당시의 유럽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큰 인기를 얻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중반에 에라스무스의 ‘죽음의 준비’(de praeparatione ad mortem)이 나오면서 그 인기가 줄기는 했어도 17세까지 다양한 판본이 팔렸다. 그 가운데 Meister E.S로 알려진 인물이 1415년 제작한 ‘Ars Moriendi’가 매우 유명하다. 그는 1450년에 이전의 원본을 바탕으로 한 요약본도 작성하였다. 1452년에 나온 문서의 정식 명칭은 Tractatus artis bene moriendi, 곧 문자 그대로 ‘잘 죽는 법에 관한 논고’이다.
이 문서는 총 6장에 걸쳐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인간이 지녀할 마음가짐을 설명하고 있다. 1장에서는 죽음에 담긴 긍정적 의미, 2장에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이 당면하는 다섯 가지 유혹, 3장에서는 임종 때의 7가지 질문,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삶을 닮을 필요성, 5장에서는 유족들에게 주는 충고, 6장에서는 임종에서 드리는 기도가 나온다.
특히 Meister E.S의 판화 작품은 유럽 전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일반 주민들에게는 1460년대에 나온 축약본도 그에 못지않은 인기가 있었다. 이 축약본은 위에 설명한 내용 중 2장을 11개의 판화로 묘사하고 있다. 악마의 유혹과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묘사하는 5개의 쌍으로 이루어진 10개의 판화와 마지막 그 모든 유혹을 거친 후 천국으로 들어가는 인간과 지옥으로 가는 악마를 묘사한 1개의 판화가 합쳐져 총 11개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흑사병이나 전쟁과 같이 인간이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는 재난의 경우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극대화된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 교회는 그것이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신의 분노에서 나온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신자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고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이 밝혀낸 대로 그것은 신의 심판도 아니고 인간의 죄 때문도 아니다. 그리고 쥐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페스트는 엔테로 박테리아 종류의 페스트균이 비말, 공기, 타액, 감염된 음식 등을 통해 전염되는 질병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당시 무지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의 뜻을 들먹이며 그렇지 않아도 질병과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주민들을 정신적으로 협박하였다. 그러면서 교회의 고위 성직자도 신의 자비를 비는 예배를 올리다가 신자들과 함께 죽어갔다. 무지에서 나오는 광기 자체가 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도 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은 코로나가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700년 넘은 골동품 같은 주장을 지금도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다행인 것은 지금의 신자들은 700년 전의 신자들만큼 어리석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은 어리석지 않은 만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명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우리를 사랑만 하는 분이니 다 용서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와 근세까지 교회가 신자들을 죄의식에 몰아넣으며 협박했던 역사의 반동이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원래 예수가 그런 존재인가?
과연 예수는 그리고 신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죽음과 구원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부활이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죽음에 관해 생각을 하다 보면 이러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과연 십자가는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실 십자가는 현재 기독교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초기에 십자가는 없었다. 신자 공동체가 십자가를 강조하기도 않았고 신자 개인들도 십자가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십자가가 갑자기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탐구는 다음 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