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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과 프랑스 사태의 공통점은?

결국 마르크스가 옳았나?

by Francis Lee

네팔과 프랑스는 단지 경제력만이 아니라 많은 점에서 차이가 나는 나라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본질은 똑같다. 바로 빈부격차다. 네팔 사태를 촉발한 직접적 원인은 정부가 소셜 미디어를 차단하려고 시도한 것에 있다. 정부의 이런 조치는 네팔의 부유층 자녀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소셜미디어에 자랑하는 것에 대한 시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조치가 오히려 도화선이 되어 장관이 린치를 당하는 상황까지 초래한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는 재정 적자를 완화하기 위해 긴축을 하면서 늘 하던 대로 복지 예산을 축소하려는 사도에 시민이 분노한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도 부유층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가난한 데 너는 잘 사냐?'는 질문만큼 인간의 근원적 폭력성을 자극하는 것은 없다. 이에 대해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너도 능력이 있으면 많이 벌어서 나처럼 인생을 즐기면 되는 것 아니냐는 답을 한다. 그러나 이미 다 알려진 대로 현재 자본주의 국가의 심각한 빈부 격차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사회 구조에 환원되는 문제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모순으로 부자가 되는 길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시민 혁명의 역사가 깊은 프랑스는 민중의 분노가 체제를 바꾸는 기폭제가 되어 왔다. 프랑스대혁명도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백성의 궁핍 사이의 대립이 가져온 분노로 촉발된 것이다. 1789년의 이 대혁명 이후 20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 당시의 근본적인 사회 대립 구조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그 당시의 왕족과 귀족의 자리를 대자본가와 정치 권력자가 차지하고 있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프랑스 같은 나라만이 아니라 이제 막 공화제가 시작되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연습하는 네팔 같은 나라도 프랑스와 똑같은 빈부 격차의 문제로 사회적 분노가 폭발하고 정권 교체까지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자체에 근본적 모순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않나?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면서 세계는 이제 공산주의는 종식되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여겼다. 특히 자본가만이 아니라 많은 우파 학자들이 앞다투어 이런 주장을 펼쳤다. 그 당시 소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여전히 유효하다.'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월가 붕괴'가 상징적으로 보여준 신자유주의의 내적 모순에 따른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는 예정된 일이었다.


자본주의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세계 경제 질서를 지배해 온 가장 중요한 경제 체제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단일하고 고정된 형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변형과 진화를 거듭해 왔다. 18세기 고전경제학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발전한 고전적 자본주의(classical capitalism)는 근대 산업혁명의 물질적 기반을 형성했으며, 20세기 후반부터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기조 속에서 세계화된 금융·상품 시장을 지탱하는 규범적 원리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많은 학자들에게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단순한 경제학적 교리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권력구조와 결합된 ‘지배 담론’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고전적 자본주의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1776)으로 대표되는 고전파 경제학에서 그 사상적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스미스는 인간의 경제 활동을 ‘자연적 자유의 체계’로 규정하며, 각 개인이 사적 이익을 추구할 때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사회 전체의 부가 증대한다고 보았다. 이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의 원리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였다.


고전적 자본주의의 특징은 무엇보다 사유재산권의 절대적 보장에 있다. 재산권은 경제적 자유의 기초였으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자본 축적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이 효율성을 담보한다고 보았으며, 독점과 특권은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스미스, 리카도,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노동을 가치 창출의 근원으로 본 점에서 공통성을 지녔다. 여기에 더해 19세기 자본주의는 산업생산과 공장제도에 기반한 실물 중심의 경제였다.

이러한 고전적 자본주의는 산업혁명과 결합하여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으나, 동시에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을 낳았다. 임금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렸고, 아동노동과 도시 빈민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19세기 후반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의 확산을 촉발했다. 이 와중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회적 모순 해결의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선언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예언과는 달리 자본주의는 돌연변이를 낳으며 승승장구했다. 바로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 체제에 대한 반발 속에서 태동하였다. 1938년 ‘리버럴리즘을 위한 콜로키움’(Lippmann Colloquium)과 1947년의 몽펠르랭 협회(Mont Pelerin Society)가 그 사상적 출발점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등이 주도하여 시장 중심의 자유주의를 복원하고, 국가 개입의 최소화를 강조하였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는 무엇보다 시장 절대주의다. 시장은 자원 배분의 가장 효율적 메커니즘으로 간주되며, 국가의 규제는 왜곡으로 이해된다. 여기에 더해 통화주의를 주장한다. 프리드먼은 통화량 조절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케인즈적 재정정책 중심의 거시경제학과 대비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민영화와 규제 완화를 금과옥조로 여긴다. 공기업의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금융 규제 완화 등이 핵심 정책 도구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세계화도 주요한 주제였다.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강조하며, 국제 무역과 금융시장의 개방을 추구한다.


이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위기 속에서 케인스주의의 한계가 드러나자, 고전적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부, 영국의 대처 정부가 대표적 실험장이 되었다. 이들은 감세, 공기업 민영화, 노동조합 약화 정책을 단행하였다. 특히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한 1990년대 이후 IMF, 세계은행, WTO를 통해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규범으로 확산되었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는 개발도상국에도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제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자본주의의 본질이 ‘노동력의 착취’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를 통해 자본축적 과정에서 빈부격차와 위기가 필연적으로 심화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19세기 후반의 빈곤 문제, 노동자 계급의 저항은 고전적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단기적 성장과 인플레이션 억제에는 성과를 보였지만, 소득 불평등의 심화, 노동권의 약화, 특히 무엇보다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지속적인 금융위기를 가져왔다. 여기에 더해 복지 예산 축소를 중심으로 한 공공서비스의 축소를 초래하였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이를 ‘축적을 위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이라 규정하며,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공공재를 약탈하는 체제라고 비판하였다.


고전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모두 시장 중심주의라는 공통된 철학을 공유한다. 그러나 두 체제는 시대적 맥락과 경제 구조의 차이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고전적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을 기반으로 한 생산 중심의 경제 체제였다면,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과 세계화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방임과 달리, 국가가 경쟁 체제를 인위적으로 ‘설계’하고 규제 완화를 제도적으로 강제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전제한다.


고전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모두 자본주의라는 역사적·사상적 계보 속에서 서로 다른 변형을 보여준다. 고전적 자본주의가 근대적 생산력의 폭발을 가능케 했다면, 신자유주의는 금융 세계화와 자본의 초국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두 체제 모두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위기를 낳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 세계는 이른바 탈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기후위기, 디지털 자본주의, 플랫폼 경제의 등장은 신자유주의가 제시하지 못하는 새로운 규범과 제도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미래는 단순히 고전적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의 연장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 사회적 공공성의 균형을 새롭게 모색하는 방향에서 결정될 것이다.


이런 와중에 터진 네팔과 프랑스 사태는 이제 마르크스가 한 말이 결국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자본주의는 외적 요인이 아니라 내적 모순으로 스스로 붕괴한다는 예언 말이다. 인간의 욕심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든 제도인 자본주의는 결국 흑수저와 금수저로 비교되는 태생적 격차와 자본주의의 제도적 모순에 따른 빈부 격차를 낳고 그 빈부 격차는 분노를 야기하고 분노는 폭력을 낳고 폭력은 사회적 혼란을 낳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 와중에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과 한국에서도 극우가 설쳐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정말 종말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어차피 이판사판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아졌으니 말이다. 다시 라면과 생수를 사모아야 하나? 참으로 답답한 시기다. 그저 우리나라만이라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만세에 평안을 누리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하늘이 훌륭한 지도자를 한국에 준 것이기를 또한 바란다.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의 어처구니없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잘 버텨서 수백조 원에 해당하는 돈을 절약하여 우리나라 국민이 잘 사는 데 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희망하면서. 5천 년을 버틴 이 나라를 신자유주의와 극우로 미쳐 돌아가는 미국이 망치게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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