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감정의 비이성과 파괴성의 역사는 영원할 것인가?
김건희와 윤석열 커플의 몰락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한국 사회가 낳은 괴물이다. 이 땅에서 나고 자라서 그 모양으로 살았을 뿐이다. 이제 이 커플에게 24%의 '친일매국노 극우' 집단을 빼고는 모조리 돌팔매질을 하는 형국이지만 사실 한국 사회에 잠재적인 김건희 잠재적인 윤석열은 차고도 넘친다.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질투와 탐욕이라는 귀신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빙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든 김건희 윤석열은 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극우 오합지졸이 외치는 'Yoon Again!'이 그저 헛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한국 사회만 질투와 탐욕에 절어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질투와 탐욕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이기에 보편적인 악이다.
인간은 흔히 이성적 존재로 규정되지만, 실제로 인간 행동의 상당 부분은 감정적 동기에 의해 움직인다. 그 가운데에서도 질투와 탐욕은 가장 원초적이며 동시에 가장 파괴적인 감정에 속한다. 간단히 말해서 질투는 타인의 행복이나 성취를 견디지 못하는 감정이며, 탐욕은 이미 가진 것을 넘어 더 많은 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충동이다. 이 두 감정은 인류 문명사의 초기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늘 인간의 행동과 사회 구조의 밑바닥에 자리해 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질투는 인간 사회의 갈등과 도덕적 교훈을 전달했으며, 구약성경은 질투와 탐욕을 최초의 죄와 살인의 원인으로 서술한다(창세 4,3~8). 중세 및 근대의 정치권력 다툼과 종교 개혁, 식민지 쟁탈전은 질투와 탐욕의 집단적 표출이었다. 명분은 사회나 집단 더 나아가 국가의 정의와 국민의 평등, 국부의 증대였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행위의 심연에는 개인적인 질투와 탐욕이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질투와 본능에 대한 서사는 일찍이 그리스 신화에 잘 드러나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강력한 힘을 지녔음에도 인간적인 감정의 모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남편 제우스의 끊임없는 외도로 인해 질투에 사로잡혀 제우스의 많은 연인과 그 자식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적 서사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권력과 지위의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으로 읽힌다. 질투는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기능을 지니며, 인간 세계의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헤라의 질투 행동은 인간이 권력과 경쟁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감정의 원형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스에서만 그런 인간의 본능적 질투와 탐욕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를 대변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영웅 길가메시는 불멸을 얻기 위해 탐욕적으로 여정을 떠나지만, 결국 불멸은 얻지 못하고 인간의 한계와 허무만을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탐욕이 결코 충족되지 않는 인간 욕망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탐욕은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 확보 본능과 결합하지만, 동시에 자기 파괴적 가능성을 내포한다.
유대교에서도 인간 본능에 대한 서사는 별로 다르지 않다. 구약성경은 인간 최초의 살인을 질투의 결과로 설명한다. 신이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이자 질투에 눈이 멀어 분노한 카인은 동생을 살해한다(창세 4,3~8). 이는 질투가 사회적 범죄로 직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신약성경에서도 인간의 탐욕과 질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탐욕의 대표적 사례로 예수를 배반한 이스카리옷 유다를 들 수 있다. 그는 '겨우' 은 삼십 냥에 자기 스승이자 신의 외아들을 권력자에게 팔아넘겼다(마태 26,15). 이는 탐욕이 신앙과 신념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질투와 탐욕은 진화심리학적으로 생존과 번식 전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곧 질투는 경쟁자 제거와 자원 확보를, 탐욕은 자원 최대화와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은 비이성적 행동을 유발하며, 때로는 자신과 사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흔히 질투와 탐욕에 눈이 먼 인간은 전두엽 기능이 현저히 제한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 들어와서도 왕권과 귀족의 관계는 질투와 경쟁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복잡한 구조였다. 예를 들어 프랑스 발루아 왕조에서는 귀족들이 왕권 강화에 위협을 느낄 때, 자신의 봉토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적 반란과 음모를 꾸몄다. 이러한 질투는 단순한 개인감정이 아니라 집단적 권력 유지와 경쟁의 동인이었다. 질투는 인간의 사회적 비교 메커니즘과 연결된다. 인간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자존감과 권력 지위를 평가한다. 이러한 심리적 비교는 왕과 귀족, 봉신과 영주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였다. 질투가 집단적 차원으로 확대될 때, 전쟁과 반란, 내분과 정치적 암살까지 발생했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을 따라 천상 예루살렘을 지상에서 미리 맛보게 해 준다고 설쳐댄 교회도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중세 교회는 성직 매매와 면죄부 판매로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다. 교회의 탐욕은 단순한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 권력과 도덕적 권위를 동시에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탐욕은 결국 사회적 저항과 종교 개혁을 초래했다. 대표적인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은 교회의 탐욕과 타락을 폭로하고, 새로운 종교적·사회적 질서를 요구하는 신호였다. 결국 이러한 탐욕은 개인적 결함으로만 볼 수 없다. 제도적·사회적 구조 속에서 강화될 때, 탐욕은 집단적 부패와 권위 붕괴를 가져오며, 역사적으로 교회 개혁, 정치 혁명 등과 연결된다.
그럼에도 질투와 탐욕의 역사는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15세기 이후 유럽 열강의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식민지 쟁탈전은 국가적 수준에서 질투와 탐욕의 확장이다. 향신료, 금, 은 등 자원을 확보하려는 욕망이 국가 간 경쟁과 전쟁을 촉발했다. 탐욕과 질투는 단순한 물질적 경쟁을 넘어, 정복 문화와 폭력적 지배 구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개인의 감정이 제도적, 국가적 수준에서 조직적으로 표출되면서 사회적 구조를 재편했다. 중세와 근대 사례에서 질투와 탐욕은 인간의 본능적 경쟁 심리와 깊이 연결된다. 질투는 타인과 비교를 통한 자원 확보 전략으로, 탐욕은 생존과 권력 유지 전략으로 기능하지만, 비이성적 행동과 자기 파괴적 결과를 동시에 유발한다.
이런 역사를 뒤로하고 등장한 자본주의는 이제 인간의 질투와 욕망의 끝장을 보여주는 기능을 발휘했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사회적 효율성을 촉진한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탐욕을 무한 경쟁 구조로 제도화했다. 기업 경영자와 주주들은 단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탐욕을 추구하며, 이는 빈부격차와 노동 착취, 환경 파괴를 동반한다. 자본주의가 중심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 질투는 사회적 비교와 소비 행위를 촉진한다. 특히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개인의 질투심과 경쟁심을 증폭시키며, 이를 소비와 경제적 행동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구조는 인간의 질투가 개인적 수준을 넘어 사회적·경제적 시스템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질투와 비교는 불안, 우울, 사회적 고립을 초래하며, 인간관계와 사회적 협력을 저해할 수 있다. 소비문화는 질투를 자극하여 경제 성장을 촉진하지만, 동시에 환경 파괴와 자원 남용을 부추긴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금융 자본가들의 탐욕과 무분별한 위험 추구가 초래한 구조적 붕괴였다. 금융 상품 설계, 신용 파생상품, 레버리지 확대 등은 탐욕이 제도적으로 내재화된 사례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개인의 탐욕이 금융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은 보상 시스템과 결합된 진화적 동기로 설명된다. 더 많은 자원, 권력, 재화를 추구하는 행동은 진화적으로 생존과 번식 전략과 연결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행동이 사회 구조와 제도적 위험으로 확대되어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현대 심리학에서 질투는 인간 감정 가운데 가장 복합적이며 사회적 기능이 강한 감정으로 평가된다. 또한 질투는 단순히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 사회적 위치, 친밀 관계를 지키기 위한 진화적 전략으로 해석된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질투는 주로 짝 경쟁과 자원 보호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짝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질투는 공격적·방어적 행동을 유발한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 연인 관계뿐 아니라, 직장·사회적 지위·재산 등 다양한 맥락에서 나타난다. 질투의 심리 구조는 인지적 평가, 정서적 반응, 행동적 충동의 삼중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곧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인지적 판단이 내려지면 대부분의 인간은 불쾌감, 분노, 상실감과 같은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고 나면 경쟁, 방어, 공격과 같은 충동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질투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생존 전략을 최적화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과도할 경우 자기 파괴적 행동과 폭력,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탐욕은 인간의 보상회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특히 이른바 '도파민 시스템'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새로운 소유나 자원, 권력 획득은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여 강한 쾌감과 동기 부여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탐욕이 이른바 '만족 내성'을 형성하며, 점점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이 과정은 인간을 무한 경쟁과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금융 투기, 도박, 과도한 소비 등이 탐욕의 뇌과학적 메커니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탐욕은 집단적 수준에서도 작용한다. 집단 내 경쟁, 기업 경영, 정치권력 투쟁 등에서 탐욕은 사회적·경제적 구조 속에 내재화되며, 단순한 개인감정을 넘어 제도적 문제를 야기한다.
질투와 탐욕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파괴적 경향을 지닌다. 질투는 타인을 공격하거나 억압하는 행동을 유발하며, 결국 자신에게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탐욕은 지나친 자원 추구로 신체적·정신적 건강, 사회적 관계, 법적·제도적 안정성을 위협한다. 역사적 사례에서도 질투와 탐욕은 사회 붕괴, 전쟁, 경제 위기 등 파괴적 결과를 초래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개인과 기관의 탐욕이 집단적 파괴로 확장된 대표적 사례이다.
인간 감정의 비이성적 충동, 자기 파괴적 측면은 생물학적 구조와 생존 맥락에서 비롯된다. 비록 질투와 탐욕은 위험하고 자기 파괴적이지만, 인간의 창조성과 혁신을 촉진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경쟁과 비교는 예술적 창작, 과학적 발견, 비즈니스 혁신 등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곧 질투와 경쟁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 개발을 유도하는 창조력의 근원이 되고 탐욕은 자원 배분과 경제 성장, 사회적 협력을 촉진하는 사회적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제되지 않는 질투와 탐욕은 사회적 붕괴와 환경 파괴, 자기 파멸을 초래할 수 있다.
질투와 탐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동시에 자기 파괴적 경향을 지닌 양면적 감정이다. 역사적·심리학적·뇌과학적 분석을 통해, 이 두 감정은 개인과 집단, 사회와 문명 차원에서 복합적 역할을 수행함을 알 수 있다.
특히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서 인간 감정을 단순히 모방하는 AI가 아닌, 인간 고유 감정의 독창성과 위험성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인간만이 지닌 비이성적 감정의 복합성, 자기 파괴적 가능성, 창조적 동력은 AI가 결코 완전히 재현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감정 연구와 윤리적 성찰은 AGI 시대 인간학 연구의 핵심 과제로 남는다. 그러나 불안은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증폭된다. 감정이 전혀 없이 오직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패러다임으로만 움직이는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과연 이렇게 비이성적인 질투와 욕망이라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이 살아남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김건희와 윤석열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저잣거리의 루저들만이 아니라 국민의힘마저 'Yoon Again!'을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걱정을 넘어선 절망이 엄습하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성이 마비된 사회의 미래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