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예수가 틀렸다면?

Credo!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by Francis Lee



한때 나를 깊이 흔들어 놓은 질문이 있었다.


“만약 예수가 한 말이 전부 거짓이라면 어쩔까?”


일부가 과장되었거나 제자들에 의해 왜곡된 정도가 아니라, 그의 말과 약속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렸다면 말이다. 신도 없고, 하늘나라도 없으며, 우주 어딘가에 도덕적 결산이 이루어지는 질서조차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제멋대로 살며 타인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지옥에 가지 않고, 조용히 정직하게 산 사람도 천당에 가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 하늘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이거나, 설령 존재한다 해도 인간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


이 의문은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회의가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깊어졌고, 사유할수록 단단해졌으며, 마침내 삶 전체를 흔드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변해 갔다.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예수에 대해 지나치게 사유하다가 오히려 길을 잃은 상태, 일종의 주화입마에 이른 셈이었다. 믿음은 단순히 약해진 것이 아니라 방향을 틀어 의심으로 변했고, 위로와 질서의 언어로 짜여 있던 신앙의 구조는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맨몸의 질문들뿐이었다.


현실은 이런 의심을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긴다. 만약 신의 신상필벌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작동한다면, 그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불공정하다. 악마와 다를 바 없는 권력자들, 이승만과 전두환 같은 인물들은 긴 세월을 살다 큰 고통 없이 생을 마쳤다. 이승만은 국립묘지에 묻히는 영예까지 누렸다. 수많은 국민의 피 위에 권력을 쌓은 인물이 ‘국부’로 불리는 현실은 아이러니를 넘어 도덕적 모욕에 가깝다. 비록 소수의 광신적 추종자들의 행태라 하더라도, 그런 찬양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회의 윤리적 균열을 드러낸다.


박정희 역시 다르지 않다. 군사독재의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그는 부하의 총탄에 의해 생을 마쳤지만, 그 죽음은 단죄가 아니라 신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넘쳐나고, 그의 이름을 기리는 거대한 기념관은 한강변에 당당히 서 있다. 역사는 진실을 기록하기보다, 힘 있는 자를 위해 기억을 정제하고 미화하는 쪽을 택한 듯 보인다.


이런 현실 앞에서 어떻게 선은 상을 받고 악은 벌을 받는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우주가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고 말하기에는, 그 곡선은 지나치게 더디거나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예수가 말한 약속들, 곧 온유한 자가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끝에 있던 자가 먼저 되며, 악인은 심판받을 것이라는 선언은 적어도 지금의 세계에서는 끝없이 연기된 약속처럼 보인다. 혹은 애초에 실현될 의지조차 없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만약 예수가 정말로 틀렸다면?”


그렇다면 이 세계는 신의 섭리가 이끄는 도덕극이 아니라, 우연과 권력, 폭력이 지배하는 혼돈의 무대일 뿐이다. 선함은 보호받지 못하는 취약한 태도가 되고, 어리석음에 가까운 것으로 취급된다. 연민과 정의는 더 이상 하늘의 명령이나 사후 보상의 논리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저 개인의 선택, 혹은 취향의 문제로 전락한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다. 만약 최종 심판도, 천국의 보상도, 모든 고통을 상쇄해 줄 내세의 ‘회계장부’도 없다면, 도덕적 행위는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아무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친절은 덜 고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급진적인 선택이 된다. 승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정의를 붙드는 일은 위선이 아니라 순수한 저항이 된다. 예수가 말한 사랑과 용서, 악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 오직 보상을 전제로 한 거래였다면, 그것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깨진 세계 속에서도 아무런 보장 없이 진실하게 살아가라는 초대였다면, 예수가 틀렸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불편할 만큼 옳다.


결국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역사는 손쉬운 믿음을 조롱하고, 현실은 정돈된 신학을 끊임없이 배반한다. 그러나 “만약 예수가 틀렸다면?”이라는 질문은 믿음을 끝내기보다, 그것을 다른 형태로 변형시킨다. 이 질문은 신앙이 살아남으려면 환상을 벗고, 불의 앞에 아무 보호막 없이 서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믿음은 비로소 죽거나—혹은 처음으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예수의 말을 믿고, 그의 언행을 삶의 모범으로 삼아 살고 싶다. 이것은 더 이상 순진한 확신이나 교리적 복종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의심을 통과한 뒤에 남은, 거의 고집에 가까운 선택이다. 예수가 틀렸을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여 생각한 뒤에도, 이상하게도 그의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약속의 형태로는 무너졌지만, 태도의 형태로는 끝내 남았다.


예수가 가르쳐 준 것은 단순한 도덕규범이 아니었다. 그는 ‘착하게 살면 상을 받는다.’라는 식의 세속적 계산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근원적인 시야의 전환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당장의 이익, 지금 쥐고 있는 권력과 소유가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그 확신 자체를 흔들었다. 인간이 집착하는 것들이 얼마나 덧없고 불안정한 지를 드러내며, 생명의 중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예수가 말한 하늘나라는 단순한 사후 세계의 ‘보상 창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계를 관통하는 또 다른 차원의 질서였다. 힘의 논리, 성공과 패배, 승자와 패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계 위에, 또는 어쩌면 그 아래에 전혀 다른 기준이 작동하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가 복되다고 말했다. 현실의 기준으로 보면 그 말은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비현실성 속에서,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근본적인 깨우침이 발생한다.


이 깨우침은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더 깊이 발을 담그게 만든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은, 이 세상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절대화하지 말라는 요청이다. 권력도, 국가도, 이념도, 심지어 종교 자체도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생길 때, 인간은 비로소 그것들에 삼켜지지 않고 책임 있게 대면할 수 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겠다고 외치지 않았지만, 그 어떤 혁명가보다도 제국의 절대성을 부정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은 순응의 언어가 아니라, 그 당시 절대 제국을 상대화하는 선언이었다.


예수가 보여 준 삶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성공하지 않았고, 안전하지도 않았으며, 결국 실패한 인생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폭력을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위해 침묵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았다. 십자가는 신학적 교리를 떠나서 보더라도, 이 세계의 방식으로 살지 않겠다는 인간의 극단적인 선택을 상징한다. 힘으로 이기고, 거짓으로 살아남고, 침묵으로 안전을 확보하라는 세상의 요구를 거부한 삶의 결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고 싶다. 하늘나라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사후에 어떤 심판이 있는지, 그 모든 것을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가 보여 준 인생관과 우주관, 곧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은 인간을 비겁하지 않게 만든다. 당장의 손해 앞에서도 진실을 포기하지 않게 하고, 보상이 없어도 타인을 존중하게 하며, 패배가 예정된 싸움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게 한다.


만약 예수가 틀렸다면, 그의 말은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옳았는데, 우리가 그를 오해해 왔다면 문제는 전혀 다르다. 어쩌면 예수는 천국의 위치를 설명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은 내세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이 세계를 절대화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그래서 나는 계산 없이 살고 싶다. 선을 행하면 상을 받는다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인간으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은 채로, 그럼에도 그의 길을 따르겠다는 이 선택은 믿음이라기보다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깨우침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지금 이 세상을 가장 진지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마음 깊이 외친다. Credo!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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