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영생을 약속한 적이 없다고?

영생은 기독교 교리가 왜곡했다.

by Francis Lee

먼저 질문을 던져보자.


“예수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무엇을 이야기했으며, 무엇을 원했을까?”


많은 기독교 목사나 신자는 그 답을 ‘영생’이나 ‘천국에 가는 법’ 같은 개념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복음서를 차분히 읽으면 의외의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는 결코 ‘영생’이라는 말을 중심 화두로 삼아 설교하지 않았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 주제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예수는 회개, 곧 삶의 방향과 관계의 전환, 그리고 폭력과 지배의 논리를 벗어나는 길을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이런 맥락에서 ‘영생’은 목적이 아니라 삶의 질이자 삶의 방향을 드러내는 결과적 용어였을 뿐이다.


예수가 말한 ‘아버지의 뜻’은 ‘어떻게 해야 영원히 사는가?’라는 고민이 아니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삶 속에서 체험하고 책임지는 언어였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진정한 내 가족’이라고 말함으로써, 생물학적 친족과 혈연을 넘어선 하늘나라, 곧 신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공동체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는 개인의 사후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의 자리(Sitz in Leben)가 어떤 기준과 방향을 지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곧 예수는 늘 ‘지금 여기의 삶이 어떤 구조로 움직여야 하는가?’를 물었다.

예수는 또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했는데 이는 단순한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제자들이 ‘지금 여기에서 관성적으로 살아온 삶의 근본적 태도 전환’을 하라는 요구였다. 예수의 말에서 하늘나라는 도달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할 현실적 변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더 이상 종말 후의 보상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과 직결된 개념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의 메시지는 분명했지만,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인 열두사도조차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복음서 곳곳에 제자들의 오해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가 섬김의 삶을 이야기할 때 경쟁적 지위를 다투었고, 그가 고난의 길을 말할 때 권력의 자리를 기대했다. 예수가 십자가를 향할 때, 그들은 궁극적인 메시아적 승리, 곧 새 다윗의 등극을 상상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이는 단순한 인간적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메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존재론적 실패였다. 유대 사회에서 ‘메시아’는 이 땅의 질서를 뒤엎고 과거 영화로운 유대 왕국의 부활을 이루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비폭력적이고 관계적이었으며, 그 방향은 유대인들의 ‘세속적’ 기대와 전혀 달랐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조차 이런 간극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가 제시한 삶의 방향을 당시 유대인의 세계관에 맞추어 해석하려 했고 그 결과로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망을 한 것이다.


문제는 이 실패가 단지 개인적 약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수의 말이 당시의 세계관 속에서 어떻게 수용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석 틀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예수는 당시 유대교 신자인 일반 대중이 기대한 메시아 상을 의도적으로 버렸고, 동시에 그가 말하려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지도 않았고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그의 메시지는 당시의 청중에게도, 그리고 자기 제자들에게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 사후 그가 시작한 운동은 큰 위기에 처했다. 중심인물이 처형되고, 그의 메시지는 즉각적인 역사적 실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부활 신앙’이 등장한다. 부활 신앙은 단순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실패’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는 틀이었다. 부활은 예수가 죽음에서도 권위를 유지하고, 그의 운동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신학적 장치였다.


특히 유대교에서 느닷없이 기독교로 개종한 바울은 부활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기독교 공동체 신앙의 기초로 재구성했다. 예수를 만나본 적도 그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없는 바울에게는 갈릴리의 예수가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가 중심이었다. 이는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단순히 계승한 것이 아니라, 예수 운동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해석 장치였다. 이런 장치 아래, 복잡한 삶의 요구는 명확한 신앙 공식으로 단순화되었고, 영생은 삶의 질이 아니라 믿음의 ‘보상’으로 자리 잡았다. 영생은 이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삶의 방향 전환’이 아니라 ‘신앙 고백의 결과’로 얻어지는 선물로 전환되었다.


사실 바울의 이러한 신학적 변형은 당시로서는 궁지에 몰린 기독교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마련한 타개책이었다. 위기에 처하고 허술한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명료한 언어가 필요했고, 여기에 믿음과 구원, 특히 영생은 그 중심에 놓였다. 그러나 이 변형의 결과, 영생 담론은 예수가 원래 추구한 삶의 방향 전환을 드러내는 것에서 ‘믿음이 강한’ 신자의 개인적 보상과 확신의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기독교 교회의 중심 교리로 이어졌다. 이렇게 예수의 본래 정신과 기독교 교회의 정신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영생 이야기 앞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이 무심해지는 현상은 교회 내외에서 모두 지적된다. 그러한 추세에 교회는 매우 강력한 위기를 느끼고 있다. 영생이 필요 없다면 교회도 필요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특히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0년 세계청년대회>를 앞두고 발표한 메시지에서, 마가복음 10장 부자 청년의 질문을 인용하며 ‘우리 각자에게 기다리는 최종적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에 온전한 의미를 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젊은이들이 실업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현실을 언급하며 ‘절망하지 말고 삶과 희망을 건설해 나가라’고 권고했다. 이 메시지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지적이 담겨 있다. 영생은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마련해 주는 존재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영생에 대한 시선”이 우리의 삶을 넓고 깊은 지평으로 이끌며, 현실을 절대화하지 않게 해 준다고 말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영생 담론이 영향을 잃은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날 문화는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성취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곧 현실적인 취업, 성취, 사회적 관계가 삶의 의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런 문화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의 영생’에 대한 담론이 당면한 현실적 문제들 앞에서 밀려난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유럽 중세 시대와는 달리 종교적 언어와 일상의 경험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영생이 교회 안에서 ‘보상의 개념’으로만 유지될 때 여기에서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성과 역사적 참여와 연결되기 어렵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많은 청년에게는 종교적 담론 자체가 그저 말뿐인 ‘추상적 약속’으로 들린다. 기독교 교회의 교리가 베네딕토 16세 메시지 속에서 지적하듯, 삶의 방향과 존재의 질을 관통하는 언어로 재해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을 ‘미래의 보상’으로만 이해하면 이는 현실적 삶의 긴장감에서 분리되어 단지 지루하게 기다리는 대상이 될 뿐이다. 정작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의 담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삶의 방향성인데도 그런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회의 말이 힘을 잃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영생이 현실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보다도 영생이 현실적 삶의 방향성과 통합되어야 한다. 예수가 말한 ‘아버지의 뜻’은 종말 이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실천되어야 할 윤리적, 관계적 대전환이다. 이는 나와 타자의 관계, 권력과 폭력의 구조, 자기 이익과 공동체의 선 사이에서 선택하는 방향성과 직결된다. 다음으로 하늘나라는 ‘현재적 실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본래 하늘나라는 죽고 나서 미래의 어디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나타날 수 있는 질서다. 내 안에, 너와 나 사이에, 이 사회 속에서 예수가 말한 정의와 연대가 실현될 때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일부분’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영생은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질서와 만나는 삶의 지속성이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현대인, 특히 청년들에게 의미 있는 영성은 삶의 문맥과 연결된 질문을 던지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베네딕토 16세의 말처럼, 영생에 대한 성찰은 우리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머릿속의 개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랑·관계·정의·연대를 실현하는 방향성으로서의 질문이어야 한다. 이렇게 영생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으로 재구성될 때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예수가 말한 ‘아버지의 뜻’은 개인의 보상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묻는 말이었다. 이 질문은 교회를 떠난 사람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을 다시 만나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영성과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오늘날 ‘영생’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점점 어색한 언어가 되어가고 있는 반면에 아이러니하게도 ‘영성 시장’ 전체에서 보면 ‘영원성’, ‘초월’, ‘의식의 확장’ 같은 주제는 여전히 강한 매력을 지닌다. 교회를 떠난 많은 사람은 더 이상 ‘천국에 가기 위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이 삶이 단순한 우연과 소멸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감각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질문은 다른 언어를 입고 등장한다. 이 지점에서 현대 영성 담론, 특히 뉴에이지 계열의 사유는 중요한 비교 대상이 된다. 뉴에이지는 전통 종교의 교리와 제도를 벗어난 채, 개인의 체험과 의식 변화를 중심에 둔다. 그 안에서 ‘영생’은 더 이상 심판 이후의 보상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영원성에 대한 자각으로 이해된다. 인간은 본래 우주적 에너지의 일부이며,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전환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 바탕에 있다.


뉴에이지 영성의 가장 큰 장점은 명확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현대인의 감각과 잘 맞는다. 죄책감이나 심판의 언어 대신, 성장과 치유, 통합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성은 삶과 단절되지 않는다. 명상, 호흡, 신체 감각, 감정 인식 등 일상의 경험이 곧 영성의 장이 된다. 게다가 뉴에이지에서는 개인을 매우 존중한다. 구원은 외부 권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깨달음과 체험 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뉴에이지 영성의 한계도 드러난다. 뉴에이지가 말하는 영원성은 대체로 윤리적 긴장 없이 주어지는 상태에 가깝다. 인간은 이미 신적이며, 이미 완전하므로 근본적인 전환이나 책임을 요구받지 않는다. 고통과 불의는 구조적 문제라기보다 의식 수준의 차이로 설명된다. 이 세계의 폭력, 불평등, 타인의 고통은 종종 그저 ‘각자의 배움의 과정’이라는 말로 중화된다. 이 때문에 뉴에이지 영성은 위로에는 강하지만, 역사와 사회를 변형시키는 힘은 매우 약하다. 개인은 평안해질 수 있으나, 불의하고 모순적인 세계는 그대로 남는다. 영원성은 개인의 내면에 흡수되고, 공동체적 책임이나 정치적 윤리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이 점에서 뉴에이지 영성은 현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지만, 그 상처가 만들어진 구조를 질문하지는 않는다.


사실 기독교가 말해온 영생은 뉴에이지와 전혀 다른 출발점을 갖는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영생은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이라는 형태로 이해되어 왔다. 이 개념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지만, 동시에 현재의 삶과 분리되면서 점점 설득력을 잃어왔다. 영생이 너무 먼 미래로 밀려나자, 그것은 현실을 견디기 위한 보상 체계로 오해되었고, 때로는 불의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서 안으로 다시 들어가면, 예수가 말한 영생은 단순히 사후의 시간 개념이 아니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이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안다’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다. 영생은 끝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질을 가리킨다. 이 관계는 죽음 이후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영생 개념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방식과 세계의 구조를 함께 묻는다. 예수가 말한 하늘나라는 개인적 평안의 상태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복이 되고, 억눌린 자가 일어나는 질서였다. 영생은 단지 ‘계속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윤리적 긴장을 동반한다. 선택을 요구하고, 방향 전환을 요구하며, 기존 질서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기독교 영생 담론은 분명한 약점도 지닌다. 교리화 과정에서 영생은 관계와 삶의 질이 아니라, 그저 한낱 신앙 고백의 보상으로 굳어졌다. 하늘나라는 지금의 삶을 재구성하는 언어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도달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영생은 더 이상 현대인의 삶을 해석하는 언어가 아니라, 현실과 단절된 종교적 표어가 되었다.


이제 질문은 분명해진다. 현대인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영생과 하늘나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뉴에이지처럼 삶과 단절되지 않되, 뉴에이지처럼 윤리적 긴장을 제거하지 않는 영생이다. 또한 전통 기독교처럼 역사와 책임을 말하되, 교리적 강요와 사후 보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생이다. 다시 말해, 영생을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깊이’로 재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관점에서 영생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영생이란 죽음을 무시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의 유한성을 직시한 채 지금의 삶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다. 그것은 나의 생존을 넘어, 타자의 존엄을 내 삶의 기준안으로 끌어들이는 방향성이다. 하늘나라는 사후에 도달하는 공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폭력과 무관심의 논리를 거부할 때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질서다. 이런 의미에서 영생은 종교적 특권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다. 뉴에이지가 말하는 ‘이미 주어진 영원성’과 기독교가 말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는 대립하기보다, 긴장 속에서 대화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내적 깊이를 회복시키고, 다른 하나는 그 깊이가 세계와 맺는 책임을 묻는다.


현대인은 더 이상 ‘영원히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만 관심이 있지 않다. 그보다 ‘이 삶이 무의미하게 흘러가지는 않는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는가?’, ‘이 세계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될 수 없는가?’를 묻는다. 바로 이 질문들 속에서, 예수가 말한 영생과 하늘나라는 다시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영생은 도피가 아니라, 각성이다. 하늘나라는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리고 이 둘이 다시 삶과 만나는 지점에서, 탈교회 이후의 영성 언어는 비로소 설득력을 갖기 시작한다.

사실 현대인은 종교적 언어에 쉽게 피로를 느낀다. 특히 ‘영생’이나 ‘구원’ 같은 표현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리기 쉽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명상, 마음 챙김, 불교 철학, 동양 사상에 다시 끌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삶의 고통, 불안, 무상함을 다루는 언어가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불교의 열반과 무상, 그리고 기독교의 영생은 서로 다른 길을 제시하면서도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이 유한한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갈 것인가?’ 불교에서 인간 존재의 출발점은 분명하다. 삶은 고(苦)이며, 그 고통의 핵심 원인은 집착이다. 인간은 영원하지 않은 것에 영원함을 부여하려 하고, 고정되지 않은 자아를 실체로 착각한다. 불교가 말하는 무상은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요청이며, 이 변화를 거부할수록 고통은 깊어진다는 통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열반은 ‘영원히 사는 상태’가 아니다. 열반은 존재가 지속되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집착과 무명의 불이 꺼진 상태를 가리킨다. 불교는 인간에게 ‘계속 살아남으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붙들려 있는 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권한다. 열반은 무(無)가 아니라, 고통을 만들어 내는 무명(無明), 곧 잘못된 인식과 반응이 멈춘 상태다. 여기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개인적 영혼의 불멸에 대한 강한 집착도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불교는 현대인의 감각에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불교는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고, 고통을 그저 여여(如如)하게 곧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불확실성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 삶의 유한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히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죽음 이후에 대한 확답을 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 진지하게 살아가게 만든다. 이러한 태도는 불안과 과잉 기대에 지친 현대인에게 깊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불교의 무상과 열반 사유에는 한 가지 긴장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라면, 역사와 사회의 부정의에 대한 분노는 어디에 놓여야 하는가? 타인의 고통을 변화시키려는 강한 열망은 또 다른 집착이 되는가? 불교 전통은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아 왔지만, 개인의 해탈에 초점을 둘수록 사회적 변혁과의 연결은 분명히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색즉시공(色卽是空)인데 뭐하러 그런 세상에서 ‘헛된’ 노력을 한다는 말인가?


반면 기독교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다. 기독교는 무상이 아니라 약속의 언어로 인간을 이해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그 유한함이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유한한 삶은 하느님의 부름과 응답이라는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본다. 기독교가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죽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상태다. 예수가 말한 영생은 불멸의 영혼에 대한 철학적 논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묻는 언어다. 영생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며, 그 시작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드러난다. 이 뜻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가난한 자와 함께하고, 폭력의 악순환을 거부하며, 용서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여는 삶의 방식이다. 기독교의 하늘나라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궁극적으로 헛되지 않다는 선언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영생 사상은 강한 역사적 긴장을 지닌다. 불의는 그냥 흘려보내야 할 무상이 아니라, 심판과 변혁의 대상이다. 고통은 단지 개인의 인식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현실이다. 영생은 개인의 해탈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과 연결된다. 그러나 기독교도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영생이 교리화되면서, 그것은 삶의 방향이 아니라 사후 보상이 되었고, 하늘나라는 지금의 책임을 미루는 핑계가 되기도 했다. 이 순간, 기독교의 영생은 불교가 경계한 집착의 또 다른 형태로 보이게 된다.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실성을 과도하게 붙드는 순간, 현재의 삶은 희생될 위험에 처한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옳은가, 어느 종교가 진리인가를 가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두 전통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다른 각도에서 비추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에게 내려놓음을 가르치고, 기독교는 인간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불교는 집착에서의 자유를 말하고, 기독교는 관계 속에서의 책임을 말한다. 하나는 존재의 무게를 덜어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의미를 견고하게 만든다. 현대인의 삶은 이 두 질문 모두가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붙들고 살아서 지쳐 있고, 동시에 아무것도 진지하게 붙들지 못해 공허하다. 이런 시대에 불교의 무상 사유는 삶을 가볍게 숨 쉬게 만들고, 기독교의 영생 사유는 삶을 가볍게 소비하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결국 종교적·철학적 사유의 가치는 정답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삶을 더 깊이 질문하게 만드는 힘에 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남는 존재가 아니라, ‘이런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존재다. 열반과 영생은 서로 다른 언어로, 그러나 공통된 방향으로 인간을 이끈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감각, 그러나 그렇기에 지금의 삶이 함부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감각 말이다. 이 감각이 사라질 때, 인간의 삶은 효율과 생존의 계산으로 축소된다. 반대로 이 감각이 살아 있을 때, 삶은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유한함 속에서도 깊이를 획득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이런 사유가 필요하다. 종교를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빈약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의 언행을 뒤돌아보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만약에 예수가 틀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