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야기 시리즈
어느 종교에나 정경이 있다. 정경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서 처음 사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의 사용은 이미 유대교에서도 이루어졌다. 그 전통을 기독교가 채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경(正經)은 그리스어로 척도(尺度)를 의미하는 κανών를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 척도를 누가 정했는가?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들 나름의 척도를 가지고 정경과 외경과 위경을 정했다. 오늘날 이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거의 모든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특정 종교의 경전의 권위는 시대와 상황에 따른 결과물인 것이다.
기독교에서 정경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다르게 정하였다. 신약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구약에서 개신교는 39권을 정경으로 15권을 외경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톨릭은 구약에서 51권을 정경으로 3권을 외경으로 규정하였다. 구약이 이리 복잡하게 된 근본 원인은 유대교에서 정경으로 사용하는 것이 역사적 변천을 거쳤기 때문이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원래 39권의 정경이 있었으나 히브리어 정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이른바 ‘70인역’에서 추가로 15권을 더하여 모두 54권을 정경으로 삼은 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이후 서기 90년에 유대인들이 얌니아 회의를 개최하고 다시 원래 39권을 정경으로 규정하며 15권을 배척해버린다. 그리고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이 타나크, 곧 경전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만 권수로는 24권이다. 편제가 기독교와 다르게 때문이다.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70인역’을 정경의 기준으로 삼아왔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개신교가 구약성경에서 39권 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가톨릭 교회에서는 트렌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에서 개신교의 반발을 물리치고 70인역을 기준으로 삼되 유대교에서 위경으로 간주하는 15권 가운데 3권을 정경에서 삭제하였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51권만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사실 종교개혁 이후 루터를 포함한 많은 종교개혁가들은 신약성경의 정경 가운데 일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정경에서 제외하고자 하였다. 특히 루터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그리고 무엇보다 요한계시록을 아예 정경에서 빼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의 권위로도 이런 일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칼뱅도 요한계시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신학자들이 정경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한 이러한 경향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성경이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종래의 주장은 ‘틀린’ 것임을 이들은 이미 이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심이 들만큼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정경을 누가 최초로 정했는가?
신약성경의 정경을 오늘날과 같이 27권으로 확정한 것은 397년 개최된 카르타고 공의회(Concilium Carthaginense)이다. 원래 카르타고 공의회는 3-5세기에 걸쳐 9차례 개최되었기에 하나의 공의회는 아니다. 그러나 이 공의회 이전에 393년 히포 교회회의에서 최초로 이미 구약과 신약에 속하는 책들을 정하였다. 카르타고 공의회는 이 결정을 공식적으로 비준한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로마 교구의 동의를 받았다. 이후 가톨릭 교회에서는 트렌트 공의회 이전까지 변함없이 이 전통을 유지해 왔다.
사실 현재는 로마 교구가 바티칸시국이라는 국체와 동일시되며 가톨릭 교회 조직에서도 교황청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으로 전 세계 교회를 ‘통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이는 교회 전통과는 다르다. 로마 교구가 수위권을 주장하여 오히려 1054년 그 당시 다른 4개의 동등한 권리를 지녔던 총대주교좌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 그 유래이다. 그리고 여전히 로마제국시대에 세워진 이른바 펜타르키아(Πενταρχία) 곧 5개 총대주교좌 가운데 4곳은 동방정교회에 속하면서 동등한 법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사실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로마에 있는 교회의 정식 명칭도 로마 가톨릭 교회(Ecclesia Catholica Romana)에 속하는 하나의 교구(Diœcesis Romana)에 속한다. 교회가 세워진 순서로 서열을 정한다면 예루살렘이 가장 우선권을 지니지만 펜타르키아에서도 처음부터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뒤졌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더불어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옥이 이슬람 세력에 넘어가면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남아 동서에서 서로 우위 대결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동로마제국이 로마제국의 법통을 이어가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사실상 기독교 교회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정치, 문화, 특히 언어가 달라서 결국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 시기에 로마교회에 속하는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를 약탈하면서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갈등은 더 이상 되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렸다. 그런데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동로마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회도 몰락하면서 로마교회가 다시 기독교의 유일한 중심이 된다. 이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회가 로마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없었다, 한 뿌리에서 시작한 기독교 교회가 파괴되는 것을 방치한 것이다. 물론 이슬람은 다른 종교에 관대한 종교이기에 오스만 제국 안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은 계속 자신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교였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 신앙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동방정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의 정경은 개신교와는 많이 다르고 가톨릭과도 약간 다르다. 모두 같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각자가 그 근거로 사용하는 성경은 조금씩이나마 다른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 내용에서도 정경에 포함된 것들끼리 서로 모순된 이야기도 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처럼 숫자를 잘못 계산한 부분까지 있다. 인간적인 실수인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교파에서는 아직도 신자들에게는 성경이 마치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는 신비한 책인 것처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위계가 중세의 무지몽매한 군중을 대상으로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 현대의 계몽된 시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파의 교조적이고 도그마적인 성경 해석이 21세기에 들어와 힘을 더 잃게 된 것은 정경의 결정 과정과 그 이후의 역사적 혼란, 그리고 더 나아가 이른바 외경과 위경의 존재 때문이다. 정경에서 충분히 요사되지 못한 예수와 그 주변 인물들의 삶에 대한 추가적인 궁금증,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논리적 근거에 대한 탐구 욕구와 일반적 호기심이 중첩되어 외경과 위경에 대한 관심이 늘게 된 것이다.
사실 그리스어로 저술된 70인역을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도 번역 과정에서 70인역 자체의 오역을 많이 발견하여 차라리 히브리어에서 직역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새로 번역하였다. 그 과정에서 24권을 39권으로 재편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본 안에 히브리어 원전이 없는 15권의 경전은 외경(αποκρυφσ)으로 별도로 구분하고 이를 정경에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 안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위세에 눌려 결국 정경에 포함시키는 데에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위에서 살펴본 대로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39권에 더한 15권도 정경으로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종교개혁 이후 이 가운데 3권은 정경에서 탈락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신이 아니라 교파 갈등의 상황에서 서로 대척하는 교회의 권위가 정경과 외경 그리고 위경을 정한 것이다.
위경(pseudepigrapha)이라는 말은 가짜를 의미하는 ψευδής와 이름을 의미하는 ἐπιγραφή를 결합한 단어이다. 곧 실제 저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가 쓴 것으로 내세워지는 책을 말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정경에 들어 있는 4 복음서조차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직접 쓴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가톨릭 교회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성서학자의 연구로 13개의 ‘바울 서간’ 가운데에도 상당수(6개)는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이 거의 분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정경으로 규정된 성경 가운데 상당수도 ‘사전적 의미의 위경’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밝혀진 것으로는 4복음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 1, 2, 3서의 저자도 알 길이 없는 문서이다. 그러나 이 문서들을 위경으로 배척하는 교회 지도자나 신자들은 거의 없다. 2000년 가까운 권위가 너무 무거운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교파의 도그마 또한 너무 무거운 장애가 된다.
한국에서는 한동안 어느 한학자가 도마복음서를 해설한 것이 대유행을 한 적이 있다. 이외에도 유다복음서, 바르나바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도 있다. 이외에 복음서로 불리지 않지만 예수와 그 주변 인물에 관한 문서들도 많다, 이 가운데 도마복음서는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여러 문서에 들어있던 것으로 2000년 전의 콥트어로 쓰인 고문서에 담긴 내용으로 1956년 공개되면서 많은 학자들의 연구로 이 복음서는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에 저술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논란은 이미 종료된 상황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복음서는 정경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누가 알겠는가? 1000년이 지나 기독교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이 도마복음서가 정경에 편입될지.
정경은 단순히 문서의 진위만이 아니라 교파 간의 갈등, 교회 안의 권위자의 입김, 그리고 역사적 상황으로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정경에 나온 것이 예수의 ‘올바른’ ‘모든’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성경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의식, 곧 대중 신심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 신심이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 생전에 그리고 부활 이후의 초대 공동체에서 마리아에 대한 경배 나아가 숭배가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특히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대중 신심이 강력하게 퍼지면서 교회 권위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만약 성경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성모 신심은 이단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 신심을 미신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교회의 권위와 대중의 신심의 역동적 관계 안에서 발전해 왔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기독교의 사상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할 것이고 변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종교는 결국 사멸되었다는 것은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리즈의 시작에서 던진 질문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예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이다. ‘모른다.’와 ‘그가 예수이어야만 한다.’이다. 다음 장에서 결론적으로 예수이어야만 하는 존재에 대하여 논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