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야기 시리즈
21세기의 물질문명 사회에서도 예수는 여전히 인기가 있다. 전 세계 인구의 30%가 넘는 25억 명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물론 과거와는 다른 믿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중세와 일부 지역에서는 근세까지이다. 1세기에 성경해석학이 등장한 것은 단순히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학자들의 열정이 낳은 것이 아니다. 시대정신이 교회를 사회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몰아낸 결과 권위와 권력이 동시에 줄어들게 된 것이다. 상징적인 사건이 2004년 체결된 유럽연합 헌장의 전문 작성 과정에서 교회가 보여준 모습이다.
유럽 헌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We the People of the European Union, united in our diversity, common history, and shared values and future, in order to form an ever-closer Union, ensure the fundamental rights of all, promote solidarity, development and the general welfare, and secure a free, peaceful and sustainable future for generations to come, establish and adopt this Constitution for the European Union.
이 전문에 기독교계는 반드시 종교를 넣고자 했다. 곧 ‘공동의 역사 공동의 가치와 미래’가 나오는 부분에 공동의 종교(다시 말해서 기독교)를 삽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도 유럽연합 본부에 서한을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특히 프랑스의 강력한 반대로 종교 구문 삽입은 실패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세속화된 유럽 사회에서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25억이지만 실제로 이들이 모두 충실한 교회의 신자는 아니다. 특히 현대 기독교의 발상지나 다름없는 유럽의 교회에 대한 충성도는 심각한 수준이다. 비록 예수가 유대인이고 기독교의 발상지가 예루살렘이지만 이미 초기부터 기독교는 로마제국, 곧 유럽과 현재 터키와 소아시아 지역의 종교였다. 특히 서기 70년 로마제국의 군대가 유대인의 반란을 제압하며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예수 공동체도 종말을 고한다. 이후 기독교는 바울이 세운 교회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 고백한 대로 이방인 곧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 신자들의 사도였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유럽 땅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기독교와 유럽 문화의 불가분의 관계를 역설하기까지 한 것이다. 물론 언론의 비판이 그 발언을 뒤따랐지만 말이다.
과연 예수는 누구의 예수인가? 유대인인가? 유럽인인가? 아니면 아시아나 아프리카인가? 물론 교회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했다는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예수는 철저히 유대인들의 회개와 그들을 위해 마련한 하늘나라를 선포한 존재였다. 유다 지역의 이웃인 사마리아조차 예수가 말한 복음을 들을 자격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오늘날 유대교와 이슬람교에게 예수는 한 사람의 예언자 일뿐이다. 또한 예수는 당시 유대교 성직자들, 특히 바리사이들의 ‘타락’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며 그들을 독사의 족속으로 비난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로 서기 70년 멸망한 이스라엘이 1948년 다시 국가를 재건하기까지 거의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 상황에 처한 유대인의 종교적 지주가 된 이들은 바로 바리사이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예수는 유대인과 무관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의 예수인가?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온 존재임을 강조한다. 성탄절과 부활절은 물론 기독교 전통의 여러 축일과 행사, 더 나아가 이교도의 것인데 기독교에 흡수된 만성절, 그리고 그와 함께 따라다니는 핼러윈도 기독교 문화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거행된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성탄절도 기독교 고유의 것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274년 12월 25일을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축일로 제정하여 태양신을 기념하는 날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 날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 곧 국교가 되면서 대신 예수의 탄생일로 기념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자들은 이 태양신을 대신하여 예수를 ‘그리스도, 참된 태양’(Christus, verus Sol)로 숭배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성탄절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는 관습을 시작한 것이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에는 니콜라스 축일(12월 6일)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런 관습을 마르틴 루터가 1535년 성탄절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을 촉진하기 위하여 성탄절로 옮긴 것이다. 그 이전부터 유행한 말구유 장식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1223년부터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는 16세기부터 대림초는 1839년 비커른(Johann Hinrich Wichern)이 시작하였다. 산타는 19세기부터 존재했으나 오늘날 전 세계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산타의 모습은 1931년부터 코카콜라가 광고에 사용한 인물이다.
다시 기독교의 예수로 돌아가 보자.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의 결정적 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이 20세기에 두 번 치러진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독일의 가톨릭 신부는 독일의 전차를 예수가 보호해주기를 기원했고 영국의 성공회 신부는 영국의 전투기가 독일을 무찌르기를 예수에게 간구하였다. 예수는 누구를 도와야 했는가? 그리고 누구를 도왔는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 6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7천만 명이 사망할 때 예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급격히 기독교 교회로부터 멀어져 갔다. 독일만 해도 매년 수십만 명이 기독교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리고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 가운데에도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은 10%대에 머물고 있다. 기독교가 시작된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설문조사를 해보면 예수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높다. 특히 미국의 경우가 그렇다. 그리고 통계자료는 종교와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그에 비하여 정작 성경에 대한 지식수준은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높지 않다. (Pew Research Center 자료 참조) 이는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경 지식과 무관한 예수에 대한 상을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갤럽이 1993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결과는 비슷하였다. 미국인의 대부분(84%)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언젠가 재림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설문에서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영국인은 절반도 안 되었다(46%). 그럼에도 예수가 인류에게 모범적이며 훌륭한 인물이라는 데에는 반대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 개인적인 삶에서 예수의 도움을 받았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같은 설문조사에서 예수가 살았던 삶을 닮은 인생을 산다고 대답한 사람은 10%에 불과하였다. 예수의 도움을 받고 예수의 재림을 믿고 예수가 매우 친절한 분이라는 인식을 함에도 막상 그의 삶대로 살아간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왜 생기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제 특정 종교의 교주라기보다는 인류의 보편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곧 이웃사랑, 자기 헌신, 이타주의, 인류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확신을 예수가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수는 이제 가톨릭이나 개신교만이 배타적으로 보유한 인물이 아니라 25억 기독교 신자가 각자 지닌 ‘나의’ 예수가 된 것이다. 과거 기독교 학자 특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와 같은 인물은 교회에서는 ‘나의’ 예수가 아니라 보편적인 ‘참된’ 예수를 찾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내세운 방법이 케노시스(kenosis), 곧 나를 비우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는 거짓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에 참다운 예수 참다운 신의 만남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비운 상태에서 내 안에 들어오는 신은 ‘나의 신’ 일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신조차 내 안에서 비울 때 진정한 신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어 신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선불교에서 참 나를 찾는 과정과 비슷하겠다. 색계의 공허한 나를 버리고 참 자아를 찾아가는 선불교의 참선 과정에서 주화입마의 폐해를 극복해야 진정한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신을 찾는 구도의 길에서 가짜 신, 곧 나만의 신을 척결할 수 있어야 참다운 신과의 합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과학주의, 상대주의의 상황에서 ‘절대’는 오히려 독재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21세기의 신과 예수는 오히려 철저히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25억의 기독교인이나 그 나머지를 포함한 76억의 인류는 궁극적으로 ‘나’의 예수와 ‘나’의 신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출발점이다. 그 25억의 예수 76억의 예수가 2000여 년 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태어난 역사적 예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는 포이어바흐가 갈파한 것처럼 단순한 인간의 이상의 투사가 아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은 이제 거의 부인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리고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예수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것이 지금의 시대정신이다. 과연 이러한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은 바로 특정 시대와 집단에서 시작된 종교의 도그마가 아니라 인류 보편 가치를 중심으로 한 문화적 접근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적 예수의 규명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부 목사들이 보여주는 시대착오적인 도그마적이고 배타적인 예수 해석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 예수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와 함께 무너져 버려 이제는 그 유적만이 남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실을 유럽은 역사적 현실로 체험하고 이미 종교적 도그마에서 문화적 기독교로 넘어선지 오래이다. 유럽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도그마적 예수는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지게 하지만 문화적 예수는 사회를 통합하고 발전시킨다. 그런 에수를 만나는 방법을 제2부에서 검토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