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Nov 10. 2020

예수는 인간이었다?

예수 이야기 II

 

당연하다. 이른바 정통 교리에서도 예수는 다른 모든 인간과 다름없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대소변을 본 존재로 이해한다. 인간인 마리아의 몸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정상적으로 출산한 인간의 육신을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망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신격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유대인들은 물론 그의 가장 친밀한 제자들도 그의 신격을 확신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그의 부활 사건 이후에 제자들은 그가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이른바 기독론(Christology)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많은 분파는 바로 이 기독론의 갈등에서 생겨나게 된다. 과연 예수가 순전히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부처처럼 득도한 거룩한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의 모습을 가장한 완전히 신성한 존재였는가? 아니면 둘 다인가?    

 

예수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초대교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성경에도 예수에 대한 호칭이 다양하게 나온다.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주가 흔히 그에게 따라다닌 호칭들이다.  

    


먼저 사람의 아들은 누구인가? 유대교 경전에서 나온 이 단어는 원래 유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자신만이 신의 후손이고 나머지 민족은 다 ‘짐승’으로 여겼다. 원래 히브리어로 ‘벤 아담’(בן–אדם)인 이 단어를 적확히 번역하면 아담의 후손이다. 신이 창조한 아담의 수수 혈통을 지닌 민족은 오로지 유대인이니 자기들을 이리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아들은 유대교의 신, 곧 야훼와의 관계에서 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사실 아담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흙을 의미하는 아다마(אדמה)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는 신이 인간을 ‘흙의 먼지’로 빚어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조어이다. 영원한 신에 대비하여 인간은 유한한 생명을 지니고 결국 흙의 먼지로 다시 돌아갈 운명에 처한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어가 다니엘 예언서에서 전혀 다른 뜻을 가지게 된다. 곧 이 ‘사람의 아들’이 종말론적인 해석에 사용되는 것이다. 당시 이민족의 억압 상태에서 고통을 당하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쓰인 이 예언서는 이민족을 모두 짐승으로 묘사하면서 최후의 날에 신이 ‘사람을 닮은 이’(כבר אנש)에게 세상의 통치를 맡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단어를 둘러싸고 유대교 자체에서도 커다란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종말과 세상 통치와 맞물리면서 이 단어는 기독교에 들어와서 메시아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단어로 해석된다.     

 

그리스어로 쓰인 사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은 오로지 예수만이 사용한다. 그러나 사실 이 단어가 ‘벤 아담’(בן–אדם)을 직역한 것이고 예수가 정말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 같은 이들은 이 단어를 복음서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추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경건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은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성경은 매우 불완전한 문서이기에 그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유일무이한 확고한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신의 아들들’(בני האלהים)이라는 표현도 야훼가 창조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사람의 아들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래서 이 단어의 의미대로 번역한다면 신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러나 신의 아들은 유대교나 기독교가 배타적으로 사용한 단어는 아니다. 중국에서도 왕을 하늘의 아들(天子)로 지칭했고 이집트의 파라오도 처음에는 신의 아들로 불렸다. 그러다가 한 때 아예 지상에 강림한 신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또다시 해석이 변하더니 이제는 신과 그의 아들인 파라오가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더니 또다시 바뀌어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왕은 신의 뜻을 지상에 펼치는 사제가 된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많은 영웅들이 신의 아들로 묘사된다. 그리고 로마시대에 들어와서는 아예 암살당한 시저를 신성한 율리우스(Divus Iulius)로 지칭한다. 그러더니 그의 양자이자 로마제국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를 ‘신성한 율리우스의 아들’(divi Iuli filius)이라고 하다가 아예 ‘신의 아들’(divi filius)로 불러버린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무렵이 예수의 생존 시기와 겹치는 관계로 이 호칭을 기독교 신자들이 가져다 쓴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신의 아들(υἱος θεοῦ)이라는 호칭이 예수에게만 사용된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교의 신을 부르면서 아빠(Ἀββά)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신과 자신의 부자관계를 명확히 한 것이다. 그런데 ‘신의 아들들’(υἱοὶ θεοῦ)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지칭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는 신의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로 정의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된 신의 아들은 유대교 전통에서 말하는 장자(בְּכוֹ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개념으로 원래 유대인들을 지칭하던 말이다. 결국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커다란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에 오면서 유대인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만이 신의 선택된 이들이라는 협소한 의미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기독교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이스라엘과 유다 왕조가 다 망해버렸으니 그렇게 말을 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예수에게 가장 흔히 붙어 다니는 메시아(מָשִׁיחַ)라는 호칭은 어떤가? 이는 원래 히브리어로 왕이나 고위 사제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직역을 하면 머리에 기름을 바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유대교에서의 왕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서는 다른 민족의 왕도 메시아로 지칭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특히 다윗과 솔로몬을 즐겨 메시아로 지칭한다. 이들이 분열과 침략으로 얼룩진 유대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그 역사에서 전성기를 이루어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를 다윗의 아들(υἱοῦ Δαυὶδ)이라고도 부른다.     


끝으로 ‘주’(κύριος)도 살펴보자. 이 단어 역시 유대교에서 이미 사용하던 것이다. 주로 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히브리어로 ‘나의 주님’(אֲדֹנָי)은 신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를 ‘70인역’(ἡ μετάφρασις τῶν ἑβδομήκοντα)에서 ‘키리오스’로 번역하면서 이 단어에 절대적인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를 기독교가 그대로 넘겨받은 것이다. 원래 그리스어에서 ‘키리오스’는 가장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이다. 그러나 여기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오로지 예수에게만 붙는 호칭으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예수를 신성화하는 데 초대교회부터 골몰했을까? 사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신격화가 노골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 그리고 바울 서간에서 본격적으로 예수의 신격화가 이루어진다. 곧 예수가 죽고 나서 수십 년이 지나 예수에 대한 전설만 남은 상황에서 교회가 설립되고 교계제도가 이루어지면서 예수의 언행록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해석이 중심이 되는 역사가 전개된 것이다. 그것도 예수의 직제자가 아닌 바울을 통해서 말이다. 이후 성경은 기독교 신자들이 직접 읽고 이해하는 글이 아니라 ‘권위 있는’ 성직자의 ‘독점적 해석’을 통해서 그 뜻이 전달되는 구조가 고착되어 수천 년이 흐르게 되었다. 이는 다른 대부분의 종교가 걷는 길이기는 하였다.     


결국 기독교는 특히 바울의 활동으로 예수를 신적 존재, 더 나아가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 있던 인간적 면모는 완전히 무시해버리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사실 예수가 유대교 전통에서는 지상의 왕이나 제사장이었는데 그 제사장의 자리에서 예수를 신으로 승격시키고 성직자 계층이 자신을 신의 대리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예수와 나머지 인간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제사장을 반드시 거치도록 하는 제도를 공고화 한 것이다. 이는 예수가 통렬하게 비판한 그 당시 유대교 사제단과 바리사이들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이천 년 가까이 기독교는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제거하고 신격화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이 결국 기독교인들 특히 기독교 성직자들이 예수를 믿지만 예수처럼 살지 않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자신을 숭배하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이 한 행동을 따라 하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예수를 신격화해버리고 그저 믿고 기도만 하는 것이 편했던 것이다.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면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예수는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예수의 말을 따르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마치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감추고 신적인 요소만 강조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인 것처럼 호도하는 성직자 세력의 출현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정작 그 ‘열매’는 그 성직자들이 따 먹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예수가 유언으로 그들 제자들에게 남긴 말은 무엇인가? 단 한 마디다. 내가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해라.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랑이 넘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다른 종교를 폄훼하는 것은 자기들끼리도 치고받고 싸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사랑이 뭔지 모를 뿐 아니라 사랑을 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가 말한 사랑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이를 자세히 다루어 보겠다.

작가의 이전글 누구의 예수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