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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Dec 05. 2020

예수를 믿는가 아니면 숭배하는가?

예수 이야기 II



예수는 생존 기간에 제자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자신이 신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의 사후 30-40년이 흐른 이후부터 그를 숭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교가 되면서 다른 모든 사상과 종교를 철저히 탄압하면서 예수에 대한 숭배를 체계화한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다.


기독교 이전의 많은 종교에서도 신에 대한 숭배가 있어왔지만 기독교만큼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숭배의 관행이 이루어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문제는 예수 자신이 이러한 배타성을 단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왜 교주의 의사와는 무관한 이런 극단적 배타성을 지닌 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바울의 등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는 인물인 바울은 자신의 박해한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예수의 모습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래서 예수의 직제자인 베드로나 야곱과 대치 국면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를 직접 보고 그를 따라다닌 이들이 체험한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바울이 이야기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사도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독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인기가 올라가고 예루살렘 밖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예루살렘 공동체도 그와 타협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원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는 예수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기억’하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이런 예수에 대한 기억과 그를 기념하는 것이 예배의 원래의 의미였다.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며 그에게 소원을 비는 행위는 초기 기독교 모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극단적인 변형이 나타나 공고화 된 것일까?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교회의 제도화에 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한 교회는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위계 조직과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원래의 예수 공동체가 아닌 종교 집단화한 것이다. 다른 종교 집단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회는 이 조직을 운영하는 데에 신성한 존재 곧 교주가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종교 집단은 반드시 신성한, 그래서 일반인이 접근하기가 불가능한 존재를 설정한다.


불교의 경우도 부처는 원래 인간에 불과한 고타마 싯다르타였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그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계파와 더불어 그를 숭배하는 계파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민간 신앙 차원에서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기보다는 인간의 일상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가 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의 상 앞에서 오늘도 수많은 불교도들이 절을 하고 자신의 소망을 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런 숭배를 요청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그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전설은 물론 그의 전생과 미래에 대한 전설까지 포괄하는 커다란 숭배 체계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과거불, 현세뿐, 미래불의 전설까지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불교의 교리와 경전의 역사비평적 분석보다는 타력 신앙적인 기복주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불교 신자들은 부처의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에는 큰 관심이 없고 불상 앞에서 세상적 복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생존 기간에 단 한 번도 가까운 제자에게 조차도 숭배를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사후 여러 전설과 더불어 숭배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교리의 발달에 민간신앙의 기복주의가 더해지면서 지상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역사비평적 이해보다는 지상에서의 복을 비는 대상으로 예수를 숭배하는 데에 더 몰두하는 상황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런 기복적인 숭배주의의 패러다임은 사실 모든 기성 종교의 특징이다. 곧 거의 모든 종교에는 신성시하는 인격적 존재, 곧 교주가 있고 그를 대변하는 사제단이 신자들과 교주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사제단이 교리서와 예식서를 작성하여 신자들을 교육한다. 그리고 정기적인 모임으로 이들의 신앙을 강화하여 결속을 다진다. 조직의 운영은 대부분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예수는 조직을 구성한 적도 없고 기부금을 걷은 적은 더더구나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예수 무리에게 돈을 마련해 주었고 이의 활용 방도를 이야기하던 유다에게 예수는 일갈한다. 당장 문 밖에 나가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라고,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나 불교나 나누어주는 것보다는 자신이 내부에 쌓는 재산이 훨씬 많다. 왜 이리된 것일까? 교주인 예수나 부처는 재물을 쌓으라고 권유한 적도 없고 그 자신도 단 한 푼도 재물을 소유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그 근본 이유는 바로 성직자들의 간계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이른바 in persona Christi, in persona Budddae의 논리를 내세운다. 곧 그들이 예수를 ‘대신’하고 부처를 ‘대신’하는 존재이니 예수와 부처에 버금가는 경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예수나 부처가 경멸한 높은 자리, 권위, 재물이 집중되고 보장되는 조직 관리에 몰두하는 것이다.


최근 어떤 승려가 부동산을 소유한 것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사실 승려라고 부동산을 취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그는 신자들의 직접적인 기부금이 아니라 간접적인 기부금인 인세나 앱 판매 금액으로 축재를 한 사람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을 자신의 의지로 사용하는 기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거룩하게 만들 것을 약속한 성직자가 오히려 세속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동산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부동산을 세속적인 자본주의의 세밀한 방법을 이용하여 전혀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법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종교적 교리와도 직결되는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면 왜 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른바 ‘무소유’를 흉내 낼 것인가? 자가는 무소유가 아니고, 자신이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법인에 판매하여 자신이 전세를 들면 무소유란 말인가? 거의 부동산 투기꾼의 모습을 보였기에 부처 앞에서 부끄러워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거룩하게 하기는 고사하고 세속의 때가 묻은 모습을 노정한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른바 신흥종교의 교주들이다. 그들은 예수를 대신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죽기도 전의 자신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숭배는 지극히 세속적인 조직 관리 기법으로 정교한 제도로 확립된다.


도대체 왜 성직자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세속화되어가는 것일까? 이것은 최근의 현상인가? 아니다. 기독교의 경우는 이미 바울이 그 선례를 남겼고 그 이후 기독교는 원래 예수가 선포한 것과는 전혀 다른 교리를 바탕으로 하는 제도화된 교회의 역사가 이어진 것이다. 바울은 너무 잘 알려진 것처럼 예수를 직접 만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사도라 부르며 예수를 대신하여 예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유다교의 개혁을 중점으로 활동을 하였지만 바울은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며 헬레니즘과 융합한, 이른바 유럽식 기독교를 전파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로 팔레스티나식 기독교 곧 예수의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의 기독교가 완전히 붕괴한 이후 바울의 유럽식 기독교는 우일한 기독교의 전범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 바울의 기독교는 철저히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조직 관리적 교회를 중심으로 확립되었다. 그래서 지극히 남성중심주의적인 권위주의의 특징을 지닌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와 전혀 다르게 여성을 모독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여성을 비하하거나 비난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을 숭배하라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안 했는데 바울은 예수를 신과 동일시하고 예수를 숭배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예수를 대신하여 예수의 ‘참 가르침’을 선포하는 자라고 선언한다. 예수를 본적도 그의 말을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이 말이다. 그리고 그의 교회는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와 같은 원시 공산주의적 공동체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보다는 조직화된 교회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선포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이미 그 당시부터 시작된 교회의 분열을 막기에 급급해한다. 조직 관리가 진리에 앞설 수밖에 없는 상황 논리에 밀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 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주를 대신하기보다는 교주를 닮아야 하는 것이다. 곧 in persona Christi나 in persona Buddhae가 아니라 in imago Christi나 in imago Buddhae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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