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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의미

by 은빛고래




'여행'이라는 단어가 사전에 어떻게 정의되었는지 알아보던 중 한 가지 재미난 것을 발견하였다. '여행'은 한자 旅(나그네 려)와 行(다닐 행)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旅(나그네 려)라는 글자가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나그네와 같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여행이라 하였다? 보통 나그네라 하면 정처나 목적지 없이 어디론가 계속 움직이는 사람을 일컫는다. 또한, 나그네는 별다른 소유물도 없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삶의 형식을 취한다. 이렇게 자유로운 존재들이 방랑하는 모습을 여행이라고 했다니! 지금의 여행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다.


얼마 전, 토요일 아침 "내일 새벽 6시 도봉산 어때?"라는 친구의 뜬금없는 카톡이 도착했다. 예전에는 함께 자주 산에 올랐지만, 서로 바빠진 이후로는 등산에 짬을 내고자 하는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회사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찰나에, 산행 제안은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웠다. "오케이! 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산행을 결심했다. 급조된 산행은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없었다. 나그네가 홀연히 길을 떠나듯,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산을 오르고자 하는 마음만이 있었다. 산은 우뚝 솟아 대지를 품고 물과 공기를 정화시킨다. 나 또한 격한 등산의 과정 속에서 잠들어있던 세포들을 일깨워 몸을 정화하고자 했다.



다음날 새벽 6시 도봉산을 올랐다. 평소 등산이라면 자신 있었기에 예전처럼 신나게 산을 올랐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오르며 산 중턱을 넘어설 때 평소와는 다른 몸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어지럼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것이라 여겨 쉬면서 초콜릿으로 당을 충전하고 다시 올랐지만, 어지럼증은 점점 심해졌다. 정신은 아득하고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가장 힘든 코스로 진입 후에는 네 발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친구는 그만 내려가자고 했지만, 무기력하게 변화된 신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기가 싫었다. "몸이 왜 이러는 거지?", "아니야, 끝까지 올라갈 수 있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태산으로 변해버린 마지막 구간을 오르며 생각했다. "고작 1년 만에 몸이 왜 이지경이 되었지?" 과도한 스트레스, 흡연, 간식, 피폐해진 마음과 무기력한 신체. 소중한 몸을 돌보지 않고 내팽개쳐 두었던 어리석음을 회고하였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돼!", "이러한 삶의 끝은 심장마비에 걸려 어느날 아침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는 것!"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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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익숙하고 습관화된 일상의 동선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활동이다. 그 속에서 새로운 문화, 기후, 풍경, 사람들을 접한다. 새로운 자극은 자신의 일상과 살아온 날들의 반추를 불러일으킨다. 자극의 밀도와 강렬함이 증가할수록 여행은 피상적인 이벤트가 아닌 실존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등산에서 한계치까지 몸을 밀어붙이며 경험해보지 못한 몸의 변화를 절절히 느끼게 되어, 삶과 일상을 전복시킨 지난 주말의 산행! 이것이 바로 실존적인 사건으로 삶의 전환점이 되는 여행이다. (산행 후 나는 이직을 결심하고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떠나는 패키지, 상품, 편의, 시설이 갖추어진 소비의 여행은 신선한 이벤트 이상의 무엇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소비가 늘어날수록 여행지의 진면목과는 유리될 수밖에 없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시설과 서비스는 일상과의 균질을 유지하되, 낯선 환경과의 차이를 없애버린다. 배낭여행으로 유럽을 일주하는 것과 고급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다녀온 여행의 경험이 비슷할 수는 없다. 전자는 낯설고 생경한 상황을 온몸으로 헤쳐 나아가며 수많은 갈등과 선택과 포기의 경험을 할 것이다. 후자는 평생을 두고두고 꺼내어 회상할 수 있는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남길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여행을 통해 실존적인 무언가를 느끼고 존재의 변이를 원한다면 나그네의 방랑과 같이 떠나야 한다. 하여, 나는 이제부터 여행이라는 단어를 좀 더 그 의미에 맞게 사용할 것이다. 여행이라는 의미의 본질을 발견한 이상, 말랑말랑하고 샤방샤방한 유람의 경험들을 나그네의 치열함과 고독이 서려있는 여행이라 말할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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