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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꾸지 않는다

[성숙해진다는 건] 서문

by 은빛고래





스물세 살 무렵 나는 삶의 변화를 열망했습니다. 그전까지의 삶은 나태하고, 충동적이며, 본능에 충실하고, 배움은 전무하여 흐리멍덩한 상태로 방황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군에서 말년 병장이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막상 사회에 나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던 찰나 때마침 사회 전반에는 시크릿 열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성공학을 접한 것입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성공해 보자!" 시크릿을 읽으며 벅찬 감격에 부풀었던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여태껏 살아온 삶의 모든 방식들을 뒤바꾸는 그야말로 삶의 총체적인 전환을 위한 원대한 꿈을.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스탭으로 버킷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공책 한 페이지를 내가 꿈꾸는 것들로 빼곡히 작성하고 주문을 외우듯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수개월간 매일 지속하며 원하는 삶과 꿈꾸는 것들로 스스로를 세뇌시켰습니다. 삶은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정신 개조를 통한 규칙과 절제는 우선 몸을 탈바꿈시켰습니다. 비만이었던 몸 상태를 불과 몇 달 만에 정상체중으로 만들었습니다. 극심한 다이어트의 고통에 금연과 금주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버킷리스트에는 정신, 육체, 마음, 인간관계, 진학, 금전 등 많은 꿈들이 혼재했습니다. 그중 가장 최종적이며 완결적인 꿈은 100억을 벌겠다는 꿈이었습니다. 리스트에 있는 다른 항목들은 모두 100억을 벌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생각하고 구성한 목표였습니다. 결국 버킷리스트의 귀결은 100억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좋아하는 것을 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고 재능이 있다고 느낀 음악을 업으로 삼기 위해 음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불과 몇 달간의 준비로 음대에 입학하였고 학사과정도 전 학기 수석과 차석을 오가며 졸업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반에서 꼴찌를 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드라마틱한 반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향한 가열 질주는 거기까지였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며 높은 현실의 벽이 나를 가로막았고, 열정으로 불타오르던 꿈들은 하나둘씩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4년 제로 편입을 하였지만, 졸업 후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없는 막막한 앞날에 음악은 어느덧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초라한 현실에 이상은 높았고, 그 크나큰 간극을 메우기 위해 결국 졸업 후 사업을 벌였습니다. 사업은 나름 열심히 준비했지만 전무한 경험과 지식으로 잘 될 리는 만무했습니다. 원대한 꿈은 산산조각 났고, 삶은 방향을 잃고 그렇게 몇 년간 방황을 거듭했습니다.


너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줄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노플랜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되거든 인생이!
그러니깐 계획이 없어야 돼 사람은
계획이 없으니깐 뭔가 잘못될 일도 없고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깐 뭐가 터져도 다 상관없는 거야!

< 영화 기생충 中 >


영화 기생충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입니다. 가족들의 정체가 탄로 날 상황에서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냐는 아들(최우식)의 물음에 아버지(송강호)가 내뱉은 말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가장의 말처럼 과연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요.


일단 극 중 아버지가 말한 '계획'이란 것을 정의해봅니다. '계획'이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행되어야 하는 선제조건들을 상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계획'의 본질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과정은 목적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에 '계획'이란 곧 '목적'과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말하는 '계획'을 곧 꿈(계획=목적=꿈)으로 대입합니다. 위에서 했던 질문을 꿈으로 대입시켜 다시 질문해 봅니다. 과연 인생은 꿈꾸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요.



인생이 결코 꿈꾸는 대로 되지 않는다면, 지금쯤은 누구도 꿈꾸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꿈을 꾸고 이상을 품고 살아갑니다. 꿈은 종종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꿈을 이룬다는 것은 목적하는 바에 따라 그 실현 가능성에 차이가 생깁니다. 자의에 의한 영역이 많을수록 실현 가능성은 아주 높아지지만, 타의에 의한 영역이 많아질수록 실현 가능성은 점점 낮아집니다.(물론 이것 또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비만인이 아름답고 멋진 몸매를 갖는 것을 꿈꾼다! 이러한 꿈은 오로지 자의에 의한 영역으로만 이루어진 꿈입니다. 오직 자신의 노력 여부에 따라 꿈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꿈이라면 자의의 영역보다는 타의의 영역이 훨씬 많아지고 실현 가능성은 극도로 낮아집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자신과 타자의 욕망이 서로 부합하게 될수록 실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처럼 꿈이란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만 실현될 수도 있으며,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예기치 않는 행운이 찾아와 실현될 수도 있고, 자신의 노력에 운과 인연이 중층적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실현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꿈꾸는 대로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의에 의한 영역으로만 이루어진 꿈을 최선을 다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꿈에 돈, 명예, 권력이 들어서는 순간 타의에 의한 영역은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하고 실현 가능성은 타의에 의한 영역과 반비례하여 지극히 낮아집니다. 특히나 빈부격차 및 계층의 고착화가 점점 심해지는 우리나라에선 꿈의 크기가 커질수록 서민들의 실현 가능성은 더욱더 희박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기생충에서 아버지(송강호)가 말한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아포리즘의 원리일 것입니다.



나는 꿈꾸었습니다. 허황된 꿈을. 100억을 벌겠다는 꿈의 크기가 허황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어떠한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0억을 벌기 위한 아무런 역량도, 경험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행 계획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호기롭게 얼토당토않은 꿈을 품었습니다. 이처럼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클수록 그 꿈은 허황된 꿈입니다. 그리고 꿈이 허황될수록 현실과의 크나큰 간극을 메우기 위해 각종 부작용들이 수반됩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여 다른 가치들은 무시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들은 비도덕성, 비윤리성, 비인간성, 물질만능으로 무장하여 사회질서를 파괴합니다. 그리고 타인을 수단 삼아 자신의 꿈을 위해 타인의 꿈마저 앗아갑니다. 우리는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결과물이 모래성같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습을 뉴스에서 매일 목격합니다. 또한 인류 역사를 통해 그들의 말로를 낱낱이 목격하였습니다. 허황된 꿈은 그 성취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꿈은 열정입니다. 열정은 뜨겁습니다 그래서 열탕과도 같습니다. 열탕은 보일러를 돌려 365일 물을 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뜨거웠던 열정은 반드시 식어버립니다. 뜨거운 열정을 동력 삼아 시작된 꿈을 향한 질주 언젠 멈추게 되고, 그때부터 존재는 허무와 공허라는 냉탕으로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지난날 꿈을 이루기 위한 뜨거웠던 열정과 꿈이 무너지고 난 후 차갑게 식어버린 공허함으로 방황했던 나의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드높은 이상을 세우고 몸과 마음에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라는 불을 질러 자신을 학대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꿈은 삶을 추동해 나아가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으로부터 비롯된 희망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꿈이 허황되거나 외부에서 주입한 표상으로 이뤄진다면 평생을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배되어 꿈의 노예로 살아갈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지금의 나는 소명의식으로 갖추어진 존재입니다. 소명의식이란 자신의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외부의 간섭과 표상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하며, 오직 내 안에 끓어오르는 진실한 욕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타고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고, 결과를 떠나 과정 자체에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워진 소명의식을 실질적,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쉼 없는 성실함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러한 소명의식을 갖은 존재는 꿈을 좇으며 자신의 삶을 열탕과 냉탕의 혼돈으로 빠지게 하지 않습니다. 삶을 굳건한 의식과 실천, 성실함으로 가꾸어 꿈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도록 운명을 내편으로 만들어냅니다.


지금 나의 소명의식은 나의 글과 사유로 내 삶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의 글과 사유로 타인과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출품하게 된 '성숙해진다는 건' 브런치북은, 나의 소명의식의 발로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의 청사진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저의 소명의식을 통해 삶의 비전을 찾고, 한층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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