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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진 은영 Apr 03. 2020

우주보다 더 큰 모리의 정원

영화 <모리의 정원>

하루에 한 번 상영하는 영화들, 특히 극장에서 3일만 머무르는 영화들은  생활이 우선이 아니라 영화가 먼저 일 때가 있다. 물론 영화를 본다고 다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가끔 괜히 본 영화들도 있다.


차가 어디 있는지 몰라 택시 타고 지하철 타고 뛰어서 겨우 겨우 영화를 보았다.  단 두 명이 앉아서 영화 [모리의 정원]을 보았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오히려 충분조건이다.

모리의 정원을 보니 일본 정원에 대한 내 기억들이  먼저 떠올랐다. 나에게는 일본다운 정원에  대한 기억이 많다.  참 오래도록 기억창고에 깊이 들어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리워지는 걸 보면  그때그때  나에게  준 감동의 파장이 컸나 보다.  내 기억 속에  일본식 정원은  항상 나무, 관목, 바위, 모래, 인공언덕,  연못,  유수 등이 자연스럽게 동네 언덕처럼  아니면 동네 연못처럼 꾸며진 곳이 많았다.


독일 쾰른에 머물던 시절  소공녀가 살다 간 듯한  다락방에서 내려와 호수를 건너면 쾰른대학 뒤에 일본 문화원이 있었다. 호수에는  수많은 오리들이 노닐고 있었는데 그곳은 우리에게  놀이터였다.  
지금은 어렴풋하지만  호수를 지나 다시 작은 연못 위로 다리를 건너면  자연스러운 풀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일본식 정원을 지나면 문화원  건물이 있었다.  그곳 또한 나의  정신의 놀이터였다.  일본 영화 수십 편을 보고 감동했던 추억의 공간이다.  



그다음은 아주 오래전 혼자  유럽 배낭여행 때  보았던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에  있던  일본식 정원이다. 작은 언덕 사이로  골골이  이어진  길들 사이에 바위와 나무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유럽적인 정원들 사이에  동양적인 정원이 있어 인상 깊었나 보다. 다행히 구글을 검색하니 자료가 있다.  


세 번째  일본식 정원에 대한 기억은 해남에 있는 해창막걸리 주조장에 있는 90년이 넘은 정원이다.  햇빛  맑은  어느 가을날 새벽 6시 친구들과  해남으로 출발했다. 중간에   집에 계시는지 주인장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주인장 왈 우리가 없으니 필요하면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고  돈을 상자에 넣어놓으라 했다.



오전 10시에 주조장에 들어서니 나무들 사이로 단풍잎에 햇살이 걸쳐 들어와 아름다웠다.  그 정원 나무 아래 밴치에 앉아  라면을 끓여  오전 내내 막걸리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정원 나무들 사이로 내려오는 가을 햇살이 참 좋았다.

그다음은 후쿠오카에 있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 <다자이 후 텐만구>에 있는 정원이다.  아주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지만 특히 신사 앞마당에  있던 아주 작은 연못이었다.  역시 작은 연못과 나무 바위가   조화로운 곳이었다.  


그 안에 당연히 잉어가 살고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하니 이 작은 연못을 찍은 사진이 없다.  다행히 내가  찍은 사진이 있어 올린다.  가끔 아름다운 풍경이 내 머리 안에 얼마나 들어있을까 궁금하다.  

<모리의 정원>은 30년 동안 정원을 벗어난 적 없는  것으로 유명한  작은  그림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 아내 히데코의  이야기를 담았다.  97세 나이로 1997년에 돌아가신  화가 구마가이모리카즈는 자연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당신의 정원에서 모든 나무와 꽃, 개미, 벌, 도마뱀 나비  등과 대화를 나누며 30년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만년에 그는  개구리, 거북이,  나비, 개미 등  마당에서 만날 수 있는  생물들을  단순하면서도 유머스럽게 그렸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 느낄 수 있다.




모리의 일상을 훔쳐보는 관객들은
자그마한 정원에서 우주를 발견하는 예술가 모리카즈와 5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반려자 히데코의 삶을 지켜보면서  아마 흔들렸을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살지?
개미와  대화를 어떻게 하지?
나도 해볼까~~


거의 하루 반나절 이상을 스스로  바쁘게 작은 정원을 돌아다니며  나무와 벌레 작은 연못을 들여다보며  대화한다.  그리고 돌아와 밥을 먹고  학교에 간다. 학교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이다.  모리는 누구보다 자기 집에서 열심히 살았다. 그림 그리기 위해서  정원에서  관찰하고 집안에 있는  학교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가끔씩 사람들이 찾아와 일상을 깨트리지만 그 또한 즐기며  당신이 생각하는 삶의 진리를 던져준다.
어떤 기술자가 자기 아들 그림을 가져와  잘 그렸는지 물어본다.


''못 그렸어''
''못 그렸다고요.''
''못 그려서 좋아.  
잘 그린 그림은 끝이 보여.
못 그린 그림도 작품이야''

사람들과 대화가  바로 선 문선 답이다. 스토리가 재미있게 전개되는 것은 없는데  정원에서 발견하는  일상은  조용한 긴장감을 주기도 하고 삶의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어느 날 여관 주인이 아주 부자 되는  현판을 써달라고 하자


<무일 물無一物  >이라 써서  보낸다.
이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무소유를 의미하는 말이다. 불교적으로는 본래부터 한 물건도 진실하고 미더운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 만물은 본래공(本來空)이므로 하나도 집착할 것이 없음을 이른다.

웃길 것도 없다. 그런데 재미있다. 모리가 정원을 산책하기 위해 온갖 사냥 도구를 챙기 듯 진지하다는 것,  개미들을 계속 관찰하는 모리의 모습, 햇빛을 쪼일 수 있는 아주 작은 연못에  계속  앉아있는 것. 도마뱀이 도망치는 모습,  모리의 수염 속에서  뱅뱅 거리는     벌레,  두 손으로 빌고 있는  파리 , 대답하는 나뭇잎  정도.


기쁜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인물들은  밥을 먹을 뿐이고   모리는 산책하고 아내는 쨍쨍 거리지만 모리를 아기처럼 다루다가도  친구처럼 응대하기도 하고 어머니처럼 위로하고 때론 존경하는 모습이  좋아서 눈물 한 방울 뚝 흘린다.  
그 사소한 행동들을 우리는 왜 못할까?  
내 안에 질문하도록 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몰입하고 미소 짓게 된다.

30년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은 괴짜 모리를 연기한 야마자키 쓰토무의 연기가  영화의 품위를 높였다. 야마자키가  모리카즈  화가를 좋아해서 만들게 되었다는 후문도 있다.
영화 속 그의 대사가  들린다. 모리 선사는 말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너무 좋다.
다시 태어나서 살고 싶다.''


또  2018년 작고한 키키 기린의  명배우의 온화한 후광 속에  인물 자체가 풍경 속에 살고 있는 듯 자연스럽다. 영화를 보는 동안  부드러운 바람을 맞고 있는  듯했다.


아내 히데코는 말한다.


''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삶이 너무 고단해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영화를 보며 각자 답을 구하는 연습도 나쁘지 않겠네요.
마지막 하늘에서 내려다 정원은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자주 작은 정원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모리의 정원에 사는 그에게 정원은 멀고 긴  정글이며 아직도 무궁한  진리가 숨어있는 우주만큼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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