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로 살아남기
어디선가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
대한민국에서 디자인 산업은 다소 기형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
보통 한정적인 인맥을 바탕으로 알음알음 소통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몇몇의 주도 그룹 외에는 들러리처럼 그들에게 박수갈채만 보내며 소외되는 디자이너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어디서 들은 이야기였는지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해당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이 문득 다시 생각나 곱씹어 생각해 보면, 그와 같은 기형적 구조가 비단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산업군 전체적인 생태계에 만연한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인을 추측해 보자면… 양극화 현상과 신뢰의 문제에서 발생한 문제 아닐까?
이와 같은 결론으로 도달하기까지의 의식의 흐름을 되짚어 보자.
먼저 디자인의 질과 수준, 서비스의 단가.
여기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 양극화 현상은, 같은 의뢰에도 단돈 몇만 원에 착수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몇천만, 몇억까지 부르는 곳도 있고, 그 결과물의 수준이나 완성도 또한 잘하는 곳과 못하는 곳이 극명하게 나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질과 수준의 간극은 깊이 파고들어 볼수록 엄청나다는 사실 또한 포함.(물론 이 부분은 그 판단의 기준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러면 또다시, 이런 디자인계에 양극화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이것도 결국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온다고 생각된다.
일단 과도한 공급. 그리고 낮은 진입 장벽.
매년 쏟아져 나오는 디자인 전공자를 비롯한 비전공 디자이너까지 헤아리면 이루 셀 수도 없으며, 여기에는 디자인이라는… 깊이 팔 수록 심도 깊은 이 분야의 특징에 반하여, '낮은 초기 진입장벽'도 거기에 한 몫한다는 느낌이다.(물론 연차가 그 디자이너의 깊이와 실력을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이는 5년 차 미만의 주니어급 디자이너 수에 비해 급격히 감소하는 5년 차 이상의 시니어급 디자이너의 비율에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아무튼 그에 따라 깊이가 낮은 디자인을 헐값에 제공하는 디자이너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그와 더불어, 그 단가에 익숙해진 많은 소비자들이 디자인의 단가 자체를 하향평준화 하여 인식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
두 번째 이유는 한정된 수요.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가치 평가.
쏟아지는 공급에 비해 디자인이 필요한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고, 그 한정된 수요 안에서도… 안타깝지만, 그 마저도 필요한 디자인이 반드시 깊이 있는 고부가가치의 디자인이 아니어도 되는 가벼운 니즈가 훨씬 많다는 것. 그렇다 보니, 생각보다 제대로 디자인에 ‘투자’하려는 사람은 흔치 않다.
말로는 모두 ‘그래, 디자인 중요하지. 대단한 일이야.’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돈’을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입장이 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니, 이거 하나 하는데 그렇게 많이 달라고? 그럴 거면 내부에서 직접 하지!
이거 뭐 대충 서체 잘 골라서 배치만 잘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는 누구누구가 이런 거… 좀 할 수 있지 않았나? 싸게 한번 부탁해 볼까?
저번에 어디서 보니, 30만 원이면 로고랑 캐릭터까지 한 번에 다 만들어주는 데가 있다던데… 거기나 연락 한번 해 봐야겠다.
대충 이런 느낌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디자인에 대한 니즈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압도적이라는 이야기다. 이들에게 디자인의 가치란 딱 그 정도. 그러니까 적당히 결론 낼 수 있고, 타협 가능한 가치라는 소리. 이런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고부가가치의, 심도 깊은, 비싼 디자인은 해주면 좋겠지만 굳이 그 정도로 돈을 들여서 까지 필요치 않다. 아니, 오히려 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마저 하기도 한다.
'무슨, 이런 거 하나 하는데 뭘 그렇게까지 해? 괜히 돈 더 받으려고 쓸데없는 항목만 늘려서 사기 치는 것 아닌가?'
자, 사설이 길어졌지만 어쨌거나 다른 한편에서는 고부가가치인 디자인을 인정하고, 또 그런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정말 극소수의 수요자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보통 그 정도의 자금을 쓸 수 있는 대기업/기관의 실무진이 대부분) 아무튼 그들은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생각하는 그 가치만큼, 디자인을 적용해야 하는 프로젝트의 중요도만큼이나… 신중하게 디자이너 혹은 대행사를 찾기 마련이다.
이 경우, 수요자들의 입장에서 ‘믿을만한’ 디자이너나 업체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나 믿을 수 없다.
대충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은 업체나 디자이너. 혹은 광고로 접하는 업체는 왠지 그냥 무턱대고 믿기에 조심스럽다. 그러면 가장 쉽게 택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인맥 or 소개’.
굳이 어려운 길을 찾아 걷는 사람은 흔치 않다.
가장 먼저 아는 지인 중에 본인이 인정할 수 있었던 디자이너를 먼저 떠올려 보거나, 본인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니즈가 있었던 지인을 통해서
“이런 디자인이 필요한데, 잘하는 사람이나 업체 아는 거 없어?”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야 일단 한번 검증된, 믿을 수 있는 디자인을 받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쉽게 생기니까.
그리고 여기에서… 디자인계의 특정 주도 그룹이 생긴다.
조금 자극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디자인 카르텔’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극소수의 수요자에게 선택된 극소수의 공급자. 그리고 그 공급자가 필요할 때 밀어주고 끌어줄 수 있는 또 다른 극소수의 공급자 몇몇. (이들도 일손이 부족할 경우, 헬퍼를 멀리서 찾지 않는다는 것은 마찬가지)
결국 대한민국은 어쩔 수 없이 학연, 지연, 혈연, 인연 등으로 이어진 인맥사회인 것이다.
나는 이 간단한 사실을 이렇게 디자인 스튜디오를 직접 운영하기 전까지는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야 유명한 대기업 출신의 디자이너들이 그 간판을 명함처럼 사용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구나… 깨닫는다.
아무튼 그 주도 그룹에 속하지 못한 디자이너들이 맨땅에 헤딩하여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이미 충분히 말했듯이 대한민국의 디자인 생태계는 이렇게 고인 물이 되기 쉬운 구조니까.
위에서 언급했던 대부분의 극소수 수요자들은 이미 그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극소수의 공급자들과의 커넥션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굳이 힘들게-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디자이너나 업체를 찾으려 들 이유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뉴비들이 아무리 멋진 디자인을 할 자신도 있고, 그런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도…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돈도 안 되는 자체 프로젝트만 계속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뭐, 사실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눈에 띌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하고, 잘해야지.
그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만큼 계속해서… 시도할 뿐이다.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고 아예 오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 않던가. 그저 손 놓고 있는다면 가능성은 0%.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고, 또 그렇게 꾸준히 땅을 파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 그 우물은 어떻게 파야 하느냐?
글쎄, 이번에도 역시나… 안타깝지만 다소 뻔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데, 경험상 이 또한 크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디자인 어워드에 출품/선정되어 극소수의 수요자들에게 우리를 선택할 수 있는 작은 근거라도 마련해주기도 하고, 무작정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보기도 하거나, 돈이 안되더라도 의미 있는 자체 프로젝트를 만들어 진행하기도 하고, 교육/강의도 나가고, 이런저런 기업 인증들도 받고, 그간의 작업물을 보기 좋게 정리해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올리고, SNS도 꾸준히 관리하고… 지금 언급한 것만 해도 항상 제대로 하기 힘들다. 이 밖에도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산더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