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OB May 10. 2023

디자이너는 디자이너가 이해한다

디자인 실무자의 머릿속



디자이너들은 디자이너들끼리 이야기를 하게 될 경우, 종종 디자이너인 그들과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을 구분 지어 지칭하고는 한다. 그럴 때면 흔히 ‘일반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아니, 비단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다른 전문직종의 종사자들도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아무튼 디자이너들은 굳이 스스로 디자이너인 자신과 ‘일반인’을 구분 지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 스스로 본인은 안목이 낮은 평범한 ‘머글’들과 다른 더 우월한 존재라는 나르시시즘적 디자인 허세와 소위 말하는 디자이너 병에 걸려서 그런 걸까?

물론 개중에 그런 사람들도 몇몇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모든 상황에서 그렇지는 않더라도 그런 감정이 알게 모르게 조금은 섞여 들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대부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사실 특별할 것 없다.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디자이너들만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들만 느낄 수 있는 상황, 감정, 디테일, 애환…

하나하나 말해 무엇하랴. 그 공감대에 대해 하나씩 열거하자면 끝도 없고, 나 또한 반 농담 삼아 말하면 머글들은 모른다.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들만의 공감대가 있고, 그들만의 이야기 속에서 얻는 위안과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반인과 구분 지어진 이 [디자이너]라는 구분 안에서도 다양한 디자이너들을 만나고 소통하다 보면 간혹 이상하게 미묘한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다. 어느 포인트에서 말이 겉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생겨나고, 자연스레 드는 생각.


‘응?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맞아?’


‘이 사람이 나랑 같은 디자이너가 맞나?’


디자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각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이다 보니, 그 안에 속한 디자이너들도 천차만별, 가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디자인의 분류만 나누어 봐도 크게는 시각, 제품, 영상, 실내, 건축, 서비스 등으로 나뉘고 그 안에서도 세분화하면 수십 가지. 그 안에서도 내가 유독 ‘다르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대부분 직접적인 고객이나 클라이언트, 혹은 특정한 목표 대상이 없는 창작자들이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런 대상들을 묶어 ‘디자이너’와 구분된 ‘작가’로 지칭하기로 했다.


혹자들은 너무 편협한 시각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말이 맞다. 실제로 현업 디자이너로써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영역은 생각보다 비좁고 편협하다. 디자인의 일반적인 정의는 ‘계획’ 혹은 ‘문제 해결’이라는 말로 일축할 수 있고, 그렇게 따졌을 시 세상에 아무런 계획도 안 세워본 사람이 없으며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안 해본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그 누구를 디자이너라고 지칭한다 한들 딱히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거시적이고 큰 개념의 디자인을 논할 만큼 그릇이 크지 않다. 어쨌거나 이런 나의 편협한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스스로를 디자이너라고 지칭하는 사람들 중 가짜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니, 가짜라는 말은 너무 간 것 같으니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순화하겠다.


작가, 기획자, 디렉터, 교육자, 어드바이저, 플래너, 컨설턴트 등 충분히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음에도 굳이 디자이너라는 말을 가져다가 붙이는 경우. 디자이너라는 어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이들을 굳이 비난할 생각은 없다. 뭐라고 하던 자유니까. 그런가 보다 싶다. 하지만 분명한 건 경험상 이들과는 내밀한 공감대가 잘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 각설하고 내가 생각하는 디자이너와 작가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 둘은 모두 세상에 없었던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형성될 수 있는 공감대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 한 가지.


작가에게는 제약이 없다.


모든 것을 하고 싶은데로, 마음 가는 데로 창작하면 된다. 그들 스스로 상정한 가상의 목표나 대상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그들에게 이러이러한걸 언제까지 만들어주세요. 한 적 없고 그 결과물을 가지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일 또한 없다는 것이다.


‘좋으면 다행이고 싫으면 말고.’


를 할 수 있다. 이 한 가지에서 오는 간극이 생각보다 굉장하다.

물론 그렇다고 절대로 내가 말하는 작가의 작업물들이 그래서 - 무언가가 부족하다던가 - 하는 그런 말이 아니다. 오히려 현업에서 할 수 없는, 제약이 없기 때문에 시도라도 해볼 수 있고 리스펙 할 수 있는 작업물들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그저 심리적 태도와 공감대의 영역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작가의 전형과도 같이 생각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다빈치, 미켈렌젤로, 라파엘로.. 등등)은 순수한 창작활동보다는 예를 들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같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의뢰를 받아 작품을 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이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지만 어쨌거나 이 주체적인 ‘작가’들은 간혹 디자이너가 듣기에 답답한 이야기를 쉽게 내뱉곤 한다. 특히 간혹 있는 학자, 혹은 장인형 작가들이 그렇다. 이들은 본인과 본인의 작업물에 대한 프라이드가 상당하다.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완성하기까지 십 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처럼. 하나의 작업물을 마스터피스로 완성시키기까지. 끝없는 고민과 끝없는 수정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듯한 말을 쉽게 한다.


“디자인은 깊이 있는 사고와 이성이 중요하지. 디자인을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끝까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고 어떻게 해서든 해결점을 찾아야지.”


“디자인을 하면서 타협을 한다고? 그건 너무 전문성 없는 태도 아니야?”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방향과 달라? 그래도 그게 맞으면 설득을 해야지. 설득을 해도 안 먹혀? 그럼 될 때까지 해.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성사시켜야지.”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데, 당장 내일이 론칭일이라고? 론칭을 미뤄. 그러면 되잖아.”


그들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말이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러나 슬프지만 현실적 제약과 시간, 단가에 치이는 디자이너의 시선에서는 그저 한 마리 학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켠에 부러움을 조용히 묻어둔다.)


어찌 되었건 간에 내 생각은 돈(대가)을 받았다면 그 순간 디자인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프로의 태도 아닐까. 그 순간부터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바가 곧 문제에 대한 인식이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깊이 있는 사고와 이성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인 모든 제약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디자인적 완성도를 높이겠다고 정해진 납기일을 못 지킨다거나, 더 좋은 방향이 있다고 클라이언트의 요청사항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전 11화 디자인을 하면서 절대 말하면 안 되는 그 단어 [그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