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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OB May 02. 2023

디자인을 하면서 절대 말하면 안 되는 그 단어 [그냥]

디자인 실무자의 머릿속

디자인 실무자의 머릿속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냥’이라는 말을 참 많이 쓴다. 

물론 나 조차도 평상시 무심코 자주 사용하는 언어습관 중 하나인 것 같다. 

간혹 혹자들은 이 '그냥'이라는 단어 안에 함축된 많은 의미와 특유의 두루뭉술한 여유 등을 이야기하며 한국인의 미덕으로 꼽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냥’이라는 말이 정말 좋은 말일까?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조건 없이,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어쩌면 명확한 이유나 조건을 댈 수가 없어서 말을 불분명하게 얼버무리거나 더 이상의 고민과 생각을 멈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지 않을까.



디자인 일을 오래 하면 할수록 느끼는 점 하나.

적어도 디자인을 하면서 그냥이라는 말은 여러모로 경계해야 할 말이며 태도라는 점이다.

실재로도 자주 겪게 되는 상황이 있다. 아래의 예시 상황을 보도록 하자.

이는 보통 경력이 많지 않은 신입 디자이너들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언어 습관이기도 하다.


"XX님, 이건 왜 이렇게 디자인하셨나요?"

"음… [그냥]… 그게 이쁘니까요?"

"그럼 그게 이쁘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어.. 으음… 글쎄요. 난 [그냥] 그게 이쁘던데…"


어느새 이렇게나 나이를 먹고 나니 직접 디자인 실무를 맡아 진행하기보다 프로젝트를 리딩하고 디렉션을 주어야 할 입장이 되는 경우가 많은 요즘, 이런 상황에서의 피드백은 난처하기만 하다.


디자이너는 작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당연한 말이지만 디자이너는 작품 활동이 아닌 디자인을 해야 한다. 여기서 디자인에 대한 원론적 이야기 - 디자인은 계획이다. - 같은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당연히 핵심을 지르는 말이지만 조금 더 실무적인, 현실적인 관점으로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모든 디자인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요즘에는 디자인 방법론 같은 것들을 보게 되면 이를 '문제 해결 능력'이라는 말로 그 본질을 이야기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디자인 실무에서 말하는 디자인의 경우. 해당 프로젝트의 시작에는 항상 수요자(클라이언트)가 있고, 그 수요자는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할 때 보통 특정한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최선의 형태를 시각화하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이 구현한 시각적 형태가 왜 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붙기 마련이다.


이 글을 보는 디자이너가 있다면 본인의 프로젝트를 떠올려보자.

그리고 본인의 디자인에 이유를 대보는 것이다. 만약 그 이유가 없다면 반성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디자인을 한 것이 아닌 훌륭한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혹은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다소 궁색하게 느껴져서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스스로가 더 잘 느낄 것이다. 조금 더 고민해 보자. 분명 더 좋은 길이 보일 것이다.


만약 디자인에 모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판단이 된다면 축하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그 판단이 자기 합리화는 아닐지,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건 아닐지 최대한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돌다리를 두드려 보는 것도 좋은 습관이다.



자, 이번에는 역지사지로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인을 의뢰하는 수요자 즉, 클라이언트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을 해보자. 이 경우에서도 [그냥]을 조심해야 하기는 마찬가지.

이번에도 상황을 가정하여 디자이너가 열심히 디자인해서 가지고 온 결과물에 대해 논의를 한다고 가정을 했을 때.


“음…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네요.”

“혹시 어떤 부분에서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이 드셨나요?”

“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별로예요.”

“아, 네….;; 그래도 조금만 같이 고민해 주시고 피드백을 주시면 최대한 반영해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냥] 다른 시안으로 다시 해주세요.”


위와 같은 상황.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아마 PTSD가 오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생각 이상으로 비일비재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이는가? 위와 같은 피드백을 받은 디자이너는 어떤 디자인을 다시 해올 수 있을까? 아마도 위의 상황이 몇 번이고 되풀이될 것이라는 것이 이미 눈에 선하게 보이지는 않는가.


이미 한차례 디자인은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이야기했듯이 좋은 디자인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목적’ 또한 명확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뻔한 이야기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

콩 심었더니 하늘까지 뻗어 올라가더라는 이야기는 재크와 콩나무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면 결국 [그냥] 만든 디자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적어도 우리는 목적 없는 결과물이 재크의 콩나무가 될 거라 믿으며 콩 하나에 소 한 마리를 바꾸는 일은 없도록 하자.



‘디자인 잘하는 데에 맡겼으니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좋은 디자인을 해 오겠지.’


만약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쩌면 클라이언트의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소신껏 한마디 한다. 너무나 안일하고 무책임한 생각이다.

디자인은 디자이너 혼자 만들고 완성하는 혼자만의 레이스가 아니다. 때로는 클라이언트와, 때로는 기획자와, 때로는 개발자와, 때로는 마케터와 함께 하며 모두가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업가라면 본인의 사업이 잘되기 위한 고민 없이, 누군가 알아서 해온 전략이나 디자인을 무지성으로 차용했을 때 그 사업이 잘 될 수 있을지 다시 한번 고민해봐야 한다. 진지하게 몇 번이고 심사숙고한 명확한 디렉션이 주어졌을 때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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