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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OB May 23. 2023

진짜 '잘한' 디자인은 어떤 건가요?

디자인 실무자의 머릿속



한 예비 디자이너분께 '진짜 잘한 디자인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평소에도 종종 받아본 질문이었고, 이번에도 역시나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도 넘는 훌륭한 디자인들과 수많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단한 디자이너들이 스쳐 지나갔다.


언뜻 명확하게 느껴졌다.


이미 어느 정도 디자인에 대한 가치관이 자리 잡은 나에게는 잠깐을 보더라도 잘한 디자인과 별로인 디자인이 보였고, 개중에는 내가 보기에 진짜 잘했다고 느껴지는 사례들이 차고 넘칠 만큼 많았으니까. 그래서 그 질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신나게… 마치 덕질이라도 하듯이 내가 생각하기에 항상 훌륭한 작업을 한다고 생각되는 디자이너, 디자인 스튜디오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든 의문 하나.

그런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답변들은 모두 내 기준, 내 분야, 내 경험이라는 한정적인 바운더리 안에서 가볍게 던지는 대답이 아닌가? 그저 우물 안에서 목청만 높이고 있는 꼴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정작 나는 해당 질문을 한 디자이너가 평소 어떤 디자인을 하고,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자세히 알지도 못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아무리 브랜딩이나 그래픽을 잘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는 어디라고 주절댄다 해도… 만약 그 질문자가 실내디자이너라면, 제품디자이너라면 별반 도움되지 않는 무의미한 말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늘어놓던 모든 말들을 지우고 다시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를 맴도는 추상적인 느낌을 짧은 글로 명확히 답변을 하려니 모든 말들이 명확하지 않게 느껴졌다. 스스로도 애매하게 느껴지는 말들을 썼다가 지우기를 몇 번 반복하던 끝에 몇 마디 궁색한 답변을 남긴 뒤, 이 주제에 대해 스스로의 생각도 정리하고자 이번 글의 주제로 정하기로 했다.


사실 그냥 내 기준에서 생각되는 바를 편하게 말해도 안 될 건 전혀 없다. 그에 대한 판단은 질문자가 할 것이고, 분명 알아서 잘 걸러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짧은 순간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불신이 생겼다. 나는 진짜 잘한 디자인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이런 디자인이 잘 한 디자인이라고 말하려면 뭐라고 해야 할까.


그 고민 끝에 내린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기본기가 다져지고 고객이 납득할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이 결론은 내가 디자인을 하며 중요하게 꼽는 가치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소거법에 의한 소거를 통해 남은 키워드를 조합한 문장이다. 어렵게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머릿속을 떠다니던 의식의 흐름을 아래 정리해 보았다.






1. 고객


고객은 언제나 내가 디자인을 할 때 강조하는 첫 번째 가치다.

아무리 세련되고 심미적인 디자인이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고객이 납득하지 못한다면 실패한 디자인이 아닐까. 같은 디자인이라도 그것을 보는 대상에 따라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그렇기에 정확한 목표 고객을 설정하고 그 고객이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디자인. 혹은 좋아할 법한 디자인을 해야 하는 법. 그래서 나에게 이 가치는 ‘잘한’ 디자인을 논한다면 절대로 뺄 수 없는 첫 번째 가치였다.


예를 들어 디터람스의 턴테이블을 가져다 두고 그 디자인적 위대함에 대해 아무리 설파한다 해도 7살 된 조카에겐 관심 밖이다. 그보다는 피카추가 백만볼트나 되는 전류를 발생시키는 것이 훨씬 위대하다. (어떻게 본다면 고객이라고 썼지만 이는 목적이나 대상이 명확한 디자인이라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




2. 대중성


대중성과 고객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가치다.

늘 말하지만 우리는 대중 전체를 고객으로 삼고자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대중성을 말하며 특별한 디자인을 바란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

대중의 취향은 생각보다 대단치 않으며 별것 아닌 선동꾼의 말에 쉽게 선동되기도 한다. 내가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하나를 보더라도 대국민 투표라는 시스템을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번 정당이 바뀔 때마다 다시 디자인되고, 그때마다 항상 욕을 먹는 서울시 브랜딩만 보더라도 느껴지지 않던가.


 조금 결이 다른 예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대중적인 요리를 떠올려보자.

어떤 이미지 인가? 달고 짜고... 자극적인 요리가 떠오르지는 않는가. 혹은 대중적 입맛으로 유명한 백종원류 식당들. 물론 맛있다. 애매하다 싶으면 일단 믿고 간다. 하지만 누구도 그 식당의 요리를 고급 요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잘한’ 디자인을 논한다면 대중성이라는 가치는 제외한다. 도저히 꼽을 수 없다.



3. 차별성


브랜딩을 할 때 매우 중요하게 고려하는 항목 중 하나.

다른 말로는 변별력 혹은 유니크함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꼭 차별화된 디자인이 ‘잘한’ 디자인인가?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평범한 디자인이라도 그 디자인의 TPO가 맞다면, 누구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잘한’ 디자인인 것이다.


이 가치는 전략적으로 유니크함 만을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이 아니라면 이미 잘 한 디자인에 한 스푼 특별함을 더하기 위한 장치로 보는 것이 옳다. 그렇기에 이 항목도 제외.  



4. 완성도

 

이것도 ‘잘한’ 디자인을 논한다면 빠질 수 없는 키워드 아닐까.

어떤 디자인이던 ‘잘한’ 디자인이라면 어느 정도 합격선에 다다를 수 있는 완성도는 필수. 그러면 완성도가 높다는 건 무엇일까? 이와 비슷한 주제로 이전에도 [세상에 궁극의 디자인이 있을까]라는 주제를 논한 바 있다.

참고로 같이 읽어봐도 좋을 것 같아 해당 게시글의 링크를 남긴다.


자, 각설하고 나는 ‘일반적’으로 디자인의 완성도는 기본기에서 온다고 본다.

디자인은 타고난 감각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이는 저 높이 있는 천상계의 이야기. 일반적으로 ‘잘한’ 디자인을 논한다면 훈련의 영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이 훈련은 기본기로 쌓을 수 있다. 그러면 이 기본기는 어떻게 쌓느냐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AI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많은 데이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한 디자인들을 최대한 많이 섭렵하고 그 평균치가 ‘체득’된 상태. 그게 기본기 아닐까.


(그렇기에 본인의 취향과 별개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은 최대한 많이 보고 눈에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주니어 디자이너라면 특히. 그리고 각 분야의 국내/외 유명 디자인 업체들의 작업물은 그들의 명성이 있는 만큼 어느 정도 검증된 퀄리티를 유지하기 마련. 어떤 작업물이 좋은 작업물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그런 업계에서 어느 정도 검증이 된 곳의 작업물들을 많이 참고하고 눈에 익히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기본기가 어느 정도 쌓이게 된다면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 가다 집어든 전단지 한 장에서도 왠지 행간이 좁아 보인다. 자간이 답답하다. 레이아웃이 좀 위태로워 보인다. 등등. 그 평균치에서 벗어난 것들이 나도 모르게 불편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시각적 재미를 유도하기 위해서 의도된 불편함인지, 미숙함에서 오는 불편함인지도 보인다.  



5. 맥락


디자인을 논한다면 빠질 수 없는 키워드.

당연히 지금과 같은 ‘잘한’ 디자인을 논한다 해도 뺄 수 없는 가치다. 패션으로 따지면 TPO를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 똑같은 디자인이라도 그 결과물이 도출되기 위한 배경상황을 알고 모르고에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천지 차이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웹사이트에 들어갔더니 모든 폰트들이 필요이상으로 대문짝 만하게 거대하고 아무런 꾸밈요소도 없이 텍스트로만 구성된 웹사이트가 있다고 해보자. 인터넷이 상용화되고 그동안 발전을 거듭했던 css나 java를 모두 걷어내고 마치 90년대로 회귀한 html 문서를 보는 듯한 페이지.


누군가는 아직도 이런 웹페이지가 현존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웹사이트가 저시력자를 위한 사이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납득이 가게 된다. 오히려 세련되고 많은 기교가 들어간 웹사이트를 납득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맥락에 맞는 디자인이란 대상을 납득시킬 수 있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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