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실무자의 머릿속
브랜딩, 브랜드 디자인, B.I디자인, B.X 디자인... 뭐라고 표현을 하던 상관없다.
어쨌거나 하나의 브랜드를 구축할 때 디자이너들은 그 브랜드만을 위한 정체성을 만들고, 그 정체성이 균일한 브랜드 이미지로 구축될 수 있도록 '브랜드 가이드' 혹은 '브랜드 매뉴얼'이라는 것을 만든다.
이 브랜드 가이드는 해당 브랜드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사람 일지라도 그 브랜드의 정체성에 맞는 비주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자료다. 그렇다 보니 그 내용을 구성하는 대부분이 해당 브랜드에 대해 정의하거나, 규정하고 권고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우리 브랜드는 이런 성격, 이런 느낌이야.
그러니까 디자인은 이렇게만 사용하도록 해.
이렇게는 절대 하지 마.
이거. 이거. 이거. 이렇게 만들어 두었으니까 이 안에서만 골라서 써.
어떤 상황에서라도 이 외의 사용은 용납하지 않을 거야.
제발 좀 마음대로 하지 마.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다소 극단적으로 작성한 것처럼 보이는 위의 내용과 크게 다를 게 없으며, 어조 또한 완강하기 그지없다. 이는 아이덴티티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이해도가 없는 일반인이 보기에 어쩌면... 침해해서는 안될 절대불변의 규칙 혹은 디자이너가 만든 성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간혹 이 브랜드 가이드를 만드는 일부 디자이너들 또한 흡사 법이라도 제정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공들여 규정한 브랜드 가이드를 어긴 사례들이나, 브랜드 가이드를 무시한 채 제 편한 데로 작업하는 각 담당자들을 발견할 때면 마치 법을 어긴 죄인이라도 본 듯 불쾌함을 느낀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가 주니어 시절 그런 경향이 심했다. 기실 브랜드 가이드를 만드는 작업은 생각보다 지난하고 고달프기 때문. 변명하자면 작업이 힘들었던 만큼 그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볼 때 드는 상실감은 생각보다 크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우리(디자이너)는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브랜드 가이드나 매뉴얼은 어디까지나 '가이드'이고 '매뉴얼'이어야 한다. 무조건 가이드나 매뉴얼을 무시한 사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유연한 시각으로 브랜드의 현황과 실태를 살피고 가이드 혹은 매뉴얼에도 수시로 업데이트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브랜드 디자인 리뉴얼에 대해서도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
간혹 일부 브랜드들은 한번 브랜딩을 하면 몇 년이고 사업을 유지하는 동안 한번 만들었던 그 브랜드 가이드를 준수한다. 말이 좋아 준수하는 것이지... 이는 몇 년이고 그 브랜드의 비주얼적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3대째 이어온 족발 맛집도 아니고...(아니, 3대째 이어진 족발집이라도 브랜드 리뉴얼은 필요하다.) 브랜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브랜드도, 그리고 그 브랜드의 디자인 가이드도 한번 만들었다고 끝이 아니다.
단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세계적 브랜드. 코카콜라나 펩시만 보더라도 주기적으로 정체성을 바꾸며 변화하고 있지 않던가. 잘 모르겠다면 당장 구글에 검색을 해 보더라도 웬만한 세계적 브랜드들의 로고 변천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마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스타벅스이지 않을까?
아무튼... 브랜딩 작업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브랜드 리뉴얼의 개념에 대해 착각하고 있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마주하게 된다. 디자이너가 그런 착각을 하고 있을 때도 있고, 클라이언트가 그럴 경우도 있다. 그 착각이 무엇이냐고? 그 착각은... 브랜드 정체성을 리뉴얼한다고 해서 기존의 것을 무조건 180도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강박에 빠져, 간혹 브랜드 가치의 변화나 브랜드 이미지 쇄신을 이유로 기존의 고객들이 따라오지 못할 무리한 혁신을 발휘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 경우 언제나 잘못된 브랜드 리뉴얼의 예시가 되어 비난을 면치 못한다.
특히 가치가 높은 브랜드일수록 기존의 브랜드가 쌓아 올린 유산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유지할 것은 유지하면서 브랜드의 현 상황에 맞게 조금씩 조금씩... 수시로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랜드 가이드 혹은 매뉴얼 또한 항상 현재의 브랜드 컨디션과 환경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고, 재깍재깍 반영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하우스 브랜드에 브랜드 디자이너가 상주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브랜드라는 개념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브랜딩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꼭 하는 비유가 있다. 머릿속으로 좋아하는 캐릭터를 아무거나 하나 떠올려 보라는 것. 만화나 영화, 드라마 등 뭐든 상관없다.
쉽게 말하자면 그 캐릭터 이꼬르(=) 브랜드라는 것이다.
브랜드나 캐릭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개연성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디자인에서는 이것을 맥락이라 표현하곤 한다.) 그래야 그것을 보고 느끼는 고객들이 브랜드나 캐릭터에 온전히 공감을 하고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배트맨을 예를 들어보자.
다크하고 시리어스 한 설정의 배트맨이 어느 날 느닷없이 SNS를 켜고 숏폼 영상을 업로드하며, 미소녀 아이돌 같은 애교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누가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을까. 혀 짧은 소리를 내면서 틱톡댄스를 추는 배트맨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끔찍하기 그지없다. 그 순간 이미 정체성을 잃은 것이다. 더 이상 그것은 배트맨이라고 할 수 없다. 그건 배트맨이 아니다.
자,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샜지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스토리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맞이하기도 한다. 밝았던 성격이 시련을 맞아 어두워지기도 하고, 반대로 시련을 딛고 성장하기도 한다. 마치 사람처럼. 사람도 성장의 과정을 거치며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지 않던가.
브랜드도 똑같다.
브랜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성장한다. 시대의 흐름, 시장의 논리에 맞춰 핵심 고객이 바뀌게 되는 경우도 있고, 핵심 제품이나 서비스가 바뀔 수도 있다. 그렇게 변화하는 브랜드에 맞추어 브랜드 디자인 또한 리뉴얼을 통한 진화를 거듭해야 한다. 그렇기에 브랜드 가이드는 유연할 필요가 있다.
브랜드 가이드는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브랜드가이드에 위배되는 사용법이라 해서 무조건 규제하고 비난하려고 하기보다 언제든 변화에 마음을 열어두고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싶었다.
왜 자꾸 초기 규정과 다른 적용 사례가 나오는지, 브랜드 가이드를 보고 적용할 실질적인 실무자들은 누구인지, 혹은 현재 브랜드의 지향점이 과거와 바뀌었다면… 과거의 디자인 규정이 현재 바뀐 브랜드 가치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파악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고민하며, 그 방안을 새롭게 디자인 가이드에 적용해서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지만 결국 요약하자면 브랜드는 한번 구축했다고 끝이 아니며 브랜드에 리뉴얼은 필연이라는 것. 그리고 언제나 그 변화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뭐, 그런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