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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쌤 May 13. 2019

나를 바꿔주신 선생님

시(時)를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시인 선생님 이야기

나에게 '시(時)'란 외워서 시험 보는 대상, 딱 거기까지였다. 지긋지긋하게 외우고, 내 느낌이랄 것도 없이 참고서에 나오는 대로 외우는 것. 죽어있는 박제품이었다.


그러던 내게도 시가 마음에 와 닿는 시기가 왔는데, 감수성이 가장 풍부한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남녀공학을 다니다 여고에 입학을 하니, 그렇게 재밌고 신날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마다 떠는 수다, 우르르 몰려가서 사 먹는 매점의 간식, 친구들. 다 하나하나 재미나고 즐거운 추억들로 채워졌다.


국어시간에 배운 김소월, 윤동주의 시가 마음을 건들였고,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감수성 예민한 소녀에게 사랑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하며 뭉클한 감정을 선사해주었다.


당시 우리 반을 지도하시던 국어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 굉장히 엄격하신 분이셨다.

님의 침묵을 낭독하신 후, 내 짝꿍에게 질문을 하셨다.


'너는 이 시에서 님을 무어라 생각하느냐?'

'저는 사랑하는 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사상이 이상하구나.. 여기서 님은 절대자 또는 조국이다'


앉아서 듣고 있던 내 심장에 파문이 일었다. 도대체 시에 정답이 있는 것인가...

내 짝이 님을 김일성이라 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여기서 사상이 왜 나오는 것인가..


그 이후로 시는 차갑게 내 관심에서 멀어졌고, 그저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출제자의 의도에 맞는 정답을 외우는, 그저 그런 장르로 격하되었다.


당시 우리 학교 도서관은 엄청난 장서 보유량을 자랑했고, 책을 좋아하던 나는 소설만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으면 눈앞에 펼쳐지는 나만의 영상에 감동했고, 푹 빠져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1년을 보내고 2학년 때 만난 선생님, 나희덕 시인.


당시 선생님은 20대의 젊은 교사로, 시를 쓰신다고 하셨다. 하얗고 맑은 얼굴에 청초한 분위기와는 대비되는 구수한 입담으로 수업을 정말 재미나게 해 주셨는데, 시인이라는 사실에 더 관심을 가졌다. 수업이 지루했으면 영영 시는 내게서 멀어졌을 법한데 참 흥미롭게 수업을 하셨다.


어느 날, 수업 중에 선생님은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라는 시를 낭독해주셨고,

그 날 가슴속에 작은 등불 하나가 켜졌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시를 듣는 동안, 교실 안 풍경은 메마른 사평역으로 바뀌었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역사 안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낸 남루한 사람들이 곁불을 쬐고 있다. 기름기 하나 없는 강퍅한 얼굴로 그저 무심하게 톱밥을 녹슨 드럼통 난로에 한 주먹 던져 넣으면, 그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오렌지 빛으로 잠시 환하게 빛나다 금세 어두워지는 팍팍한 풍경. 고단하고 위로받고 싶은 인생들이 스쳐갔다.


시가 이렇게 아름답구나, 이렇게 축약된 글로 엄청난 상상력이 생기는구나..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 시간 이후로 시를 쓰지는 못해도, 시를 때때로 즐기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실연의 아픔으로 우는 친구에게 안도현의 시로 위로하고, 나도 위로받고,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며 어설프게 우리 선생님 흉내를 내며 아이들에게 음악을 시로 가르치기도 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고등학교 은사님이 나희덕 시인이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한다.

선생님이 본격 전업시인이 되기 전에 배울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


선생님 덕분에 시를 느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그곳이 멀지 않다'는 시집에 수록된, 나희덕 시인의 시 중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시다.

이 시집 안에는 좋은 시가 가득하니 사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최근작 '파일명 서정시'도 같이 담아 무료배송으로 두 배의 감동을 받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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