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몬세라트 대성당, 귀로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연 이틀 가우디 투어를 하며 엄청나게 걸은 덕분에 노쇠한 골반과 무릎이 움직일 때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휴족시간을 붙이고 족욕도 해보며 나름 애를 써도 눈 오는 날 백구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중에 쌓인 피로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밤 비행기를 타야 함에도 몬세라트 수도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우리는 아침부터 퉁퉁 부은 얼굴로 일정을 서두른다. 애써 서로에게 눈길을 두지 말자고 합의한다. 닮은꼴의 퉁눈붕어 2마리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에스파냐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미술관 앞 계단에서 시내를 조망한다. 우리 주위에서 선함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키고 있는 신들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스쳐 지나가는 이가 주워 건네는 지갑에서(소매치기를 생각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경험이다) 일상 속 순간들이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마지막 날을 마음껏 누린다.
버스를 타고 오늘의 목적지인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향한다. 카탈루냐 인들의 마음속에 우리나라 단군 신화 속 태백산 신단수처럼 영적이고 영험한 기운이 서린 몬세라트 산은 바르셀로나 북서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여기에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검은 성모상을 기념하기 위한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그 신성이 더해진 장소이다. 16세기 해발 725미터의 돌산 계곡에 세워진 수도원은 1811년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었으며 1881년 레오 13세 교황이 검은 성모상을 카탈루냐 수호성인으로 선포한 뒤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성모상의 영험한 기운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한다.
톱니를 닮은 기암괴석들이 가득 자리한 암벽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높은 산으로 이어지는 산악열차와 저 멀리 보이는 전망대를 눈에 담고 수도원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간다. 산타마리아 광장에서 아트리움을 지나 이어지는 긴 줄을 따라 선다. 카펠라 5개를 지나 천사의 문을 지나 이동한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줄에 살짝 조바심이 일었지만, 박물관처럼 곳곳에 자리한 유물들을 바라보며 움직이니 느리게 지나는 걸음이 되려 더 고마운 순간이다. 화려한 황금빛의 격자무늬 천장들은 갑옷의 미늘처럼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생동감으로 우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다. 몬세라트에서만 볼 수 있다는 카를로 마라타의 그림, 목동들의 경배는 생생한 결들로 움직이고 에스콜라냐 소년합창단이 되고 싶었던 병약한 소년의 슬픈 이야기가 담긴 소년상도 보인다. 딱 하루만 합창단이 될 수 있었던 어린 소년의 표정이 또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검은 성모상은 성스러운 동굴이란 뜻의 산타코바에서 발견된 나무 조각상이다. 오랜 시간 동굴 속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밝힌 촛불의 그을음으로 이렇게 검게 변색되었다는 속설도 있다. 아름다운 제단에 놓여 황금빛 옷을 걸치고 우리를 맞이하는 몬세라트의 성모 La Virgen de Montserrat. 우리는 성모의 손에 올려진 구를 맞잡고 기도를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다해 드리는 기도의 제목은 이루어지는 날까지 함구하기로 했지만, 살짝 젖어있는 눈매만으로도 누구를 위해 기도를 했는지 짐작이 된다.
얼마나 간절해야만 이루어질 소원인지 소원의 무게를 가늠해 보라 한다면 나의 심장의 무게라 답하고 싶다. 몇 안 되는 성모 발현지의 귀한 유물이니 하늘과 직통 라인 하나쯤 갖고 있지 않을까?( 하나님! 어떻게 이 소원 즉결 처리 좀 안될까요? 들리십니까아아아!)
성모상 뒤의 소성당이 가우디의 첫 번째 작업이라고 한다. 건축가 팀의 프로젝트로 참가한 것으로 1878년 가우디의 작업노트에 기둥 장식에 대한 고민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소성당의 기둥장식과 동일하다고 해서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그의 첫 작품으로 인정한다고 한다.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공간이라 더 반갑다.
평일 오후 1시 30분에는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인 몬세라트 합창단의 성가 공연이 열린다. 마리아상부터 보기 위해 서둘렀던 이유도 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이다. 소년들이 등장하고 반주가 시작되자 소란이 일시에 멎는다. 곧이어 맑게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성당 안에 가득 찬다. 천진하고 귀여운 얼굴 어디서 이렇게 고운 화음이 나올 수 있는지 영상을 찍는 동안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헛기침 하나라도 저들이 하늘에 올리는 음악에 소음으로 묻어날까 봐 숨죽인 시간. 성모 마리아상을 가는 길에 놓여있던 소년의 동상 속 표정이 이해가 간다. 이곳의 아이들은 합창단으로 선발되는 걸 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9세에서 14세의 소년들이 변성기가 오기 전 세상 더없이 아름답고 맑은 미성으로 드리는 성가합창으로 그 자리에 모여있던 많은 이들이 치유를 받는 것만 같았다.
공연을 보고 성당에서 나오는 길에 마련된 제단들에는 빼곡하게 촛불이 밝혀져 있다. 3유로와 2유로, 초를 사서 불을 붙일 수 있다기에 냉큼 돈을 내고 불을 붙인다. 색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불꽃들이 저마다의 소원의 무게로 일렁인다. 오래 꺼지지 않고 빛나고 있길 마음 다해 기원해 본다. 곳곳에 자리한 수비라치의 조각상이 나를 쫒는 눈길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움직여 보기도 한다. 음각의 조각 덕분에 어디로 움직이든 계속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눈길을 마주하며 속삭여본다.
"다시 만나요, 우리."
아베마리아의 길을 지나 밖으로 나온 우리는 비교적 쉬운 축에 든다는 산책길을 통해 산타코바와 십자가 길을 통해 전망대로 향한다. 그쪽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면 전체 풍경을 담을 수 있다고 하기에 가까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일이 흔치 않기에 겨드랑이에 땀나도록 걷는다. 에스콜라니야 소년합창단의 노랫소리가 계속 여운으로 남는다. 덕분에 왕복 1시간의 길이 짧게 느껴진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 때문에 치솟는 엔도르핀이 무거운 엉덩이를 밀어 올린다.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지평선 끝과 산능선이 만나는 곳부터 아스라이 펼쳐져 전설의 시작처럼 느껴지는 풍경들이 발아래 펼쳐지는 순간을 마음껏 누린다.
무리하게 시간에 쫓겨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동생이 모든 걸 군소리 없이 소화한다.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구글맵을 찾아보고, 검색을 하고, 다른 일정들을 계획하는 일을 보는 것이 즐겁다.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녀석인데 내 사진의 모델이 되어주고(반체념이지만) 우리가 있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되도록이면 다 해보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행이 우리를 바꾸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우리 두 자매. 어릴 적 이사 온 시골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던 우리가 어느 날, 문득 저 바다 건너 스페인에 와 있다니 생각할수록 놀랍고 경이롭다. 그리고 가는 날까지 소매치기나 테이큰 속 어떤 위험장면 등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이 시간들을 온전히 누렸다는 것도 큰 축복이 아닐까 싶다.
"자, 이제 뛰어 봐. 언니가 뛸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가니가 좀 위태하겠지만, 뭐 어쩌겠어. 지구 중력을 벗어나 제일 높이 올라온 거 같으니, 내 경험상. 나 지금 어지럽다. 실은. 빨리 내려가기 전에 기념샷 하나 남기자. 하나, 둘, 셋에 뛰어. 그냥 죽어라 뛰어. 알았지?"
나이 먹어가는 언니에 대한 배려는 1도 없는 냉혈한 녀석, 그 주문이 마법주문이 되어 빨간 구두를 신은 것처럼 나는 정말 뛰어올랐다. 몬세라트 하늘 위를 비상하는 독수리처럼 두 팔을 펼치고 곧 만날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날았다.
공항으로 가는 길, 버스 안에서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머리를 맞대고 잠들었던 우리는 사람들의 소란에 일어나 짐을 챙겨 공항에 들어섰다. 벌써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수속을 마치고 지루한 기다림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른다. 이코노미석 바로 앞줄을 잡은 덕분에 오는 길은 한결 수월했다. 꼬박 12시간을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 떠 있다. 구름을 가르고 태양을 향해 달리며 지난 시간들을 가만히 되짚어본다.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들이 그립고 낯설고 늘 떠오를 것 같은 아련한 마음에 계속 사진파일을 넘겨보다 소설가 김영하 시칠리아 여행기 속 한 문단으로 여행의 마지막을 기록해 본다.
나는 시라쿠사의 퇴색한 석회암 계단에 앉아 저 멀리 희붐하게 빛나는 지중해의 수평선을 보며 열아홉 살의 봄에 경험했던 찬란한 행복을 회상했다. 모두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손을 높이 쳐든 채 <젊었다>를 부르던 그날을.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 오래 준비해 온 대답, 김영하 복복서가 P. 91.
동생과 내가 같이 누린 시간들이 우리를 응원할 내일을 그려본다. 때때로 꺼내 마음속에 넣어 둘 꺼지지 않는 장작불이 되어 줄 지금을 통해 알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었던 오늘을 기억하며 하루에 한 번은 소리 내어 크게 웃을 수 있길, 약속하자. 우리.
Streaming Life, 너와 나의 흘러가는 삶이 아름답게 영글어가는 내일을 꿈꾸며 늘 힘내며 살아갈 수 있기를. 꼭.
*같이 듣고 싶은 곡 :
최나경 - 시네마 천국, 예스터데이
https://youtu.be/oiakhByTwv4?si=PLzOTSkD5etGpZ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