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운전면허증 취득보다 더 쉬운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합법적인 총기소지입니다.실제로 총기소지가 가능한 나이제한을 하고 있는 곳은 미국의 50개 주 중 20개 주와 워싱턴 뿐이며, 그중에서도 뉴욕시는 16세, 몬태나주는 15세로 각 주마다 제한하는 나이 또한 다양하답니다.
어릴 적 아빠께서 갖고 있던 공기총으로 오리사냥을 같이 해 본 것과 고등학교 시절 해양청소년단에서 해군사관학교 방문 시 유격 훈련 때 총기를 가까이 접한 뒤로는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저인지라, 공구상 가서 전동 드릴 구입하듯 총을 살 수 있다는 이 나라의 체계는 정말 놀랍고 두려웠더랬죠. 총기에 접근하는 일이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이 담배 사는 일보다 쉽다니요.
더군다나 다른 30개 주에서는 나이제한이 없기 때문에 초등학생들조차 마음먹으면 총기를 보유할 수 있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생존자와 사망자로 친구들이 갈리는 비극적인 총기난사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나죠. 그렇다면 왜 법을 고쳐 피해자를 막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 걸까 궁금하시죠? 법 위의 법, 헌법에 명시된 총기 소지 자유의 권리 때문이죠.
미국의 수정헌법에서 강조하는 것은 제1조 종교와 표현의 자유, 제2조 무장할 수 있는 권리. 이 두 가지는 미국인들에게는 절대 침해받을 수 없는 인권과 동일시되는 기본권으로 자리 잡고 있죠. 총기 소유 및 휴대에 일정한 제한을 두려면 이러한 헌법 조항을 다시 개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지만 헌법을 고치는 일이 어디 쉬운 가요?
미 의회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 암살 직후인 1968년 총기규제법을 제정한 적인 있었는데, 주간 총기 거래 금지, 거래인 면허제, 전과자 미성년자 정신병력자에 대한 판매금지 등을 규정하는 것 밖에 성공하지 못했대요. 그 뒤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 때 백악관 공보비서 제임스 브래디가 머리에 유탄을 맞아 반신불수가 된 후 1993년 의회에서 총기규제를 강화한 ‘브래디법’을 통과시키죠. 이 법은 총기 구입 시 5일간을 기다려야 하며, 구입 이유 명시와 전과 조회 의무화를 규정하는 내용이었는데, 후에 전국총기협회(NRA; National Rifle Association)의 로비에 막혀 결국 전과조회 요소는 위헌판결을 받고 법안에서 빠지게 돼요. 설립 128년 역사에 400만 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되어 있는 NRA는 현재에도 미국 정계에 거액의 정치후원금을 내며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로비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영화 미스슬로운은 이 단체의 대표 격에 해당하는 원로 국회의원 샌포드가 자신들의 진영으로 승률 100%를 자랑하는 로비스트 슬로운을 영입하려다 실패하며 시작해요. 총기 규제를 위한 "히튼해리스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그녀를 영입하려고 했지만, 개인적 신념으로 총기규제를 해야 한다는 입장인 그녀는 정치계 거물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자신의 회사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여요. 그 소식을 들은 히튼-해리스 법안에 찬성하는 쪽 회사 피터슨 와이트 대표가 직접 나서 그녀를 자신의 회사로 영입하죠.
활동 후원금이 총기규제를 반대하는 쪽과 비교하면 다윗(찬성)과 골리앗(반대)의 싸움 같은 두 진영의 로비로 매일 바뀌는 국회의원들의 숫자가 총격 없는 싸움으로 치열하게 벌어지죠. 그 과정이 얼마나 쫄깃하게 펼쳐지는지 모처럼 긴장감 가득한 순간들에 몰입했어요. 규제 반대편의 은밀한 로비로 찬성 쪽에 표를 던졌다가 돌아선 의원으로 표심이 흔들리게 되자 그를 응징하는 슬로운의 모습이 나옵니다. 배신한 의원의 퇴근길에 거대한 쥐모형이 퍼레이드 하듯 그를 호위하며 조롱하는 모습이 순식간에 매스컴에 보도되자, 다시 그녀에게 돌아서는 의원.
국민을 위한 법안 투표가 아닌 자신의 안위와 이익이 먼저인 이들을 통쾌하게 비웃는 한방이었죠. 잘 벼린 칼날처럼 이리저리 곪은 부분을 도려내는 그녀의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샘포드 쪽 반대진영은 가장 치졸한 방법으로 그녀의 사생활을 파헤쳐 결국 날조된 진실로 그녀를 청문회에 세우죠.
계속된 공방에서 수정헌법에서 보장된 개인의 권리를 내세우며 묵비권을 행사하던 그녀가 청문회 말미, 이런 말을 해요.
"언론과 청문회는 저란 사람을 미국 민주주의의 기생충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는 총기 규제를 위한 저의 싸움이 제 경력에 대한 욕심임을 암시합니다. 가끔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옳은 일이기에 행동합니다. 전 히튼 해리스 법안이 옳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 때문에 이 일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처음 이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저는 경쟁심에 사로잡혔었습니다. 승리에 대한 제 욕망 때문이었죠.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이기고 싶었죠. 때문에 제 행동은 윤리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집착에 사로잡혀 선을 넘었고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배신했으며 그들의 삶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저는 어떤 부정을 저지른 것보다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히튼 해리스 법안을 떠올릴 때 의회의 모든 의원님들께서는 그 법안의 본보기를 제가 아니라 제 뒤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 삼아주시길 바랍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 왔습니다. 저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분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나라의 이익을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제 소원은 헛된 것이고 절대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이 나라 체제가 썩었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따라 투표하는 정직한 의원에게 보상하지 않고, 쥐 같은 자들에게 보상하죠. 자기 자리만 보전하면 나라도 팔아먹을 자들에게 말이죠. 이 쥐들이 미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기생충입니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의 속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담담한 어조로 고발하며 변화를 촉구하는 번제물이 되죠. 스스로의 경력까지 내어놓고 자신의 신념을 향해 돌진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와닿습니다. 누구보다 넓은 시야를 갖고 깊은 통찰력으로 상대방의 반격까지 예상하고 계획한 그녀의 영리한 게임 덕분에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주연배우 제시카 차스테인의 완성도 높은 연기력, 보시면서 정말 많이 감탄하실 거예요. 큰 개요만 이야기합니다. 더 이야기하면 뒤의 내용 재미없구먼요.
우리가 믿고 있고, 이루어지길 바라는 신념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우리 사회의 앞으로의 방향이 어디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던 시간이었습니다.
"신념 있는 로비스트는 자신의 승리만을 믿지 않는다."
슬로운을 영입하기 위해 피터슨 와이트 대표가 그녀에게 건네 쪽지에 적힌 말이죠. 자신의 승리만이 아닌, 모두의 신념의 승리를 위한 걸음을 준비할 때이죠. 요즘이요. 그녀와 함께 잠잠히 내일을 준비할 시간을 만들어보심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