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o Apr 05. 2024

손톱달에 찍힌 도장








시간의 증인들





 사전투표가 시작되었다. 투표하러 가기 전 염색을 하고 머리를 다듬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찍을 한 표가 앞으로의 시간들을 다르게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보다 신중하고 정결한 몸과 마음의 상태로 투표장에 가고 싶었다. 명절 되면 얼음장 같은 물에서라도 목욕을 해야 한다며 재촉하던 엄마의 영향일까? 어릴 적부터 은연중에 습득되는 수많은 것들이 일상에서 톡 튀어나올 때면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특정 음식에 대한 선호도, 생활습관, 그리고 정치적 성향까지. 요즘 연일 카톡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내게 전달하는 우리 고여사 님의 정신건강과 평안을 위해서 어서 선거가 끝나길 바란다. 저마다의 신념의 끝이 같지 않더라도 결과를 두고서 우리 서로 싸우지 말고 결과에 순응하자는 약속을 받아내야 가능한 마무지만 말이다. 혼자만의 의식을 핑계로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생명체가 되어 미용실에 앉아있던 시간, 손에 들고 있던 오르한 파묵의 <다른 색들>이란 책에서  문장을 접했다.  




 
지진뿐 아니라, 지진에 대한 그 어떤 예방 조치도 없었으며, 지진이 난 후에도 구조 인력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대책도 세우지 못한 정부는 국민의 신임을 잃었다. 하지만 속수무책에 빠진 국민들은 언젠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신과 같은 힘이라는 이미지가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에 정부는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신임을 되찾을 것으로 예상했다. 구조도 늦고, 처음에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건물도 붕괴된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중략)

 하지만 '조직'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때리고, 억압하고, 위협하고, 금지하고, 폭력을 사용하는 논리로 조직된 정부는 도와주거나, 상처를 감싸 주거나,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일을 해내지 못한다.

                                    - 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 p. 143 중에서




 글을 읽다 멈칫한다. 터키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목도한 작가가 재난의 현장을 사진작가인 친구와 함께 직접 걸으며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오르한 파묵이 던진 질문을 이어받는다. 정부의 필요성은 무엇일까? 어떤 정부를 나는 원하고 있는가?






시간의 결






 한참을 이 구절에 붙들려 응시하던 중 영화 <스윙보트> 속 버드의 심드렁한 얼굴이 떠올랐다. 심각한 알코올의존증 환자로 술을 마시고 걸핏하면 딸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회사에서 맡긴 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결국 해고되는 사회적 루저인 버드.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투표날 학교 수행평과 과제로 투표장에 간 일을 주제로 글짓기를 해야 하는 딸 몰리와 투표장에서 만나기로 하지만 이마저도 해고당한 충격으로 술을 마시다 잊어버리고 잠들어 버린다. 그런 아빠를 기다리다 결국 투표종료 직전 몰래 들어가 아빠 대신 몰리가 한 표를 행사하는데, 투표용지함에 들어가던 그 표가 정전으로 인해 그만 반이 잘려버린다.



 초박빙의 대결이 이어지고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현 대통령 앤드류와 민주당의 후보 그린 리프는 이름도 생소한 미국의 작디작은 마을 텍스코의 반이 잘려 무효가 된 이 한 표에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걸어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미국의 복잡한 투표방식을 생각한다면 가능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동화같기도, 한 편의 코미디 같기도 한 상황이 펼쳐진다. 온 매스컴의 시선이 쏠린 텍스코의 버드. 그에게 양 진영의 선거지지자들이 몰려와 진을 치고, 무슨 일을 해도 대서특필이 되며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엄청난 물량 공세가 펼쳐진다. 심지어 낚시를 좋아하는 버드로 인해 댐을 지어 버드의 낚시터를 없앨 뻔한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을 철회하고, 낙태법 반대를 외치던 민주당의 그린리프는 버드의 말에 따라 자신의 정책을 포기하는 등 여러 가지 촌극이 일어난다.  



 버드는 자신에게 쏟아진 유명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백악관에 초대되고, 유명 카레이서가 자신을 만나러 오고, 다른 진영에서는 버드와 친구들의 성대한 파티를 개최해 주는 꿈같은 일주일이 흘러간다. 그런 아빠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딸 몰리는 아빠 대신 자신의 집으로 쏟아지는 전국의 유권자들의 편지를 읽어보며 자신이 살아가는 나라의 미래에 대해 염원하는 이들의 다양한 소망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정신 못 차리는 아빠를 각성하게 만드는 몰리. 아이로 인해 백일몽에서 빠져나온 버드는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명의 후보를 앞에 두고 토론회를 열게 된다. 토론회의 시작에 앞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을 먼저 시작하는 버드.



 저는 맘대로 살아왔고 아무 신경도 안 썼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앞에 있는 저의 딸에게요. 그리고 제 조국에요. 국가에 봉사한 적도 희생한 적도 없습니다. 저에게 요구된 무거운 짐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법을 잘 지키고, 투표하고...... 미국에 있어서  진짜 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저일 겁니다.

 오늘밤 평균 이하의 인간이 훌륭한 두 분을 놓고 선택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그 사람의 한 표가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내일 대통령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워싱턴에서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이 아니라 말만 앞세우지 않는 더 큰 인물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반쪽 아닌 온전체를 꿈꾸며








 생각보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투표소를 찾는 중이다. 투표용지를 나눠주는 이들은 신분증을 확인하며 자기들끼리 점심메뉴를 이야기하는 중이다. 무료하게 앉아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는 걸 지켜보며 갈치조림이냐 돼지김치찜이냐를 놓고 설왕설래 중인 이들 사이의 심각한 토론을 들으며 투표용지 위에 한 표를 행사한다. 이런 소음들이 좋다. 저마다 분주하게 활기차게 살아가는 일상들이 가득하면 좋겠다.  



 투표용지에 정성껏 도장을 찍은 뒤 또 한 번 엄지손톱 위에 살짝 찍는 도장. 손톱달 위로 사람인이 새겨진다.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형상화한 기호가 선명하게 빛난다. 삶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시간들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강물과 같다. 저마다의 색과 소리로 흐르는 물들이 서로에게 막혀 역류하거나 다른 땅을 침수시킬 때도 있지만, 묵묵히 흘러가 큰 물에 닿아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까지 그 흐름이 멈추지 않길.


 당신의 한 표가 또 다른 아름다운 물꼬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진정한 봄이여, 어서 오라!













* 같이 듣고 싶은 곡



정은지 :  너란 봄


https://youtu.be/PWDISJZr7Yc?si=qNxUM1ZqFfvopybr


작가의 이전글 상 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