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분주히 베란다를 치웠다. 오래전에 지어진 아파트라 다른 곳보다 앞, 뒤 베란다 폭이 꽤 넓은 편인데 이곳에 러닝머신과 책장들을 놓아두었다. 코로나 시기에 외부와의 단절을 택하고 되도록이면 은거하며 살았던 터라 이 공간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하나둘씩 늘어난 화분으로 이제 조금은 더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작은 화분 속 풀들이 모두 생명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들일 수 없어서 한 번씩 화원 밖 유리창으로만 눈맞춤 하던 아이들을 최근에 덥석 데려와 버렸다. 이후 인터넷을 뒤져 흙을 주문하고 배율을 고민해서 섞고 마오리족이 만들었다는 영양제도 안에 넣어 맛깔스럽게 보이는 흙밥도 만들어 본다. 이건 비밀이지만, 정말 궁금해진다. 마오리족이 만든 다육이 영양제, 그 동그란 갈색구슬 맛이 어떤지 먹어보고 싶었다.
하나 먹어보는데 아무 맛도 안 난다. 밍밍하다 심심하고 텁텁한 맛이란. 두 개를 먹어봐도 똑같다. 어릴 적에 이렇게 개사료도 집어먹어보다 배탈 난 적 있었는데 그래도 식물이 먹는 건 인체에도 괜찮은가 보다. 이후 몇 개를 집어 먹었어도 무탈하니 다행인걸 보니 말이다.
테이블야자와 자보
핑크 콩고와 버킨
오늘 오전엔 모처럼 난 볕이 좋아 베란다 화분대 앞에 작은 앉은뱅이책상을 펼쳐놓고 방석까지 깔아놓은 뒤 앉아 글을 쓴다. 완성되었다 생각하는 글들도 다시 보면 고칠 것 투성이라 매일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래도 오늘은 이 아이들 앞에서 고치니 마음이 더 정갈해지고 차분해지는 기분이 든다. 잘 안 풀려서 소리치고 싶을 때도, 조그만 녀석들 놀랄까 봐 숨만 한번 크게 내쉬고 마니 심신 수양에도 꽤 도움이 된다고 할까?
식집사의 제1 원칙, 큰소리 금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금고아를 걸었다. 가르치는 녀석들에게도 이제 큰소리 못 내니 쌓여가는 한숨이 뱃속에서 몽글몽글 뭉치는 기분이다. 으읔....
그렇게 조금은 차분하게, 살짝은 허전하게 지나던 오전,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이이이이~~~~~~~~~~~~! 우리 은바오 사고쳤다아아아!"
지리산 맹금류도 놀라 도망가게 만들 우렁찬 포효에 놀라 전화기를 놓쳤다. 발등을 찍은 전화기는 수명연장 했다지만, 내 발등에는 순식간에 시퍼런 멍이 든다. 이런...
"왜? 무슨 일인데에에에에에에?"
얼마 전 조카 은바오가 안전체험관으로 현장학습을 갔었다. 법적 나이는 중학교 1학년이지만 정신연령은 이제 7살 정도가 되는 우리 은바오는 자폐증으로 이렇게 느릿느릿 자라는 아이이다. 이 녀석이 호기심이 부쩍 많아졌다. 특히 손 근육이 약해서 조작이나 이런 것들을 잘 못했는데 요즘 제법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어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꽤 고무적이다. 단추 끼우는 일도, 신발을 신고서 운동화끈을 묶는 일도 그동안 은바오에게는 너무 어려운 과제들이었는데 이제 하나씩 느리지만 시도하는 모습들에서 희망이 보이니 어찌 아니 기쁠 수가!
그런 녀석이 소화기 사용법을 배웠다고 한다. 안전핀을 뽑고 노즐을 쥐고 분사를 하는 클래식한 소화기, 그걸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소방관 아저씨들께서 알려주시는데 꽤 유심히 집요하게 바라보더란다. 오전 수업 도중, 갑자기 몸을 일으킨 녀석이 단추도 제대로 못 풀어 매번 교복셔츠가 머리에 끼어서 "살려주세요!"이러는 녀석이 어떻게 안전핀을 뽑았는지 모르겠지만... 뒤 이야기는 차마 묘사할 수 없어 꾹 삼켜버릴 테다.
흰 거품으로 때아닌 눈사람이 되어버린 선생님들께서 교실 전체가 겨울왕국이 되는 걸 재빠른 대처로 막아내셨다고 한다. 어찌어찌 수습은 되었지만 약을 뒤집어쓴 조카는 조퇴를 하고 집에 와버렸는데, 연락을 받고 학교에 달려간 제부에게 교장선생님께서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녀석, 아주 제대로 배워왔네. 교육 갔다 온 보람이 있네!"
아...! 이렇게 이쁜 말이 어디 있을까?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점심 먹다가 말고 달려간 제부와 동생은 당혹스럽고 황망했던 마음을 달래고 은바오를 데리고 돌아오며 내게 이렇게 전화를 한 것이다.
그리스어 돌+얼굴 이 두 단어가 합쳐진 리톱스
알파카와 녹비단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토끼풀 같다. 복슬복슬 토끼 꼬리처럼 꽃을 피우는, 들판의 그 꽃, 그 풀. 행운을 가져다준다며 어릴 때 풀밭에 코를 묻고 계속 찾아 헤맸던 4장의 잎.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서 두꺼운 책 사이에 두고 가만히 말렸던 날의 마음이 생각나는 말이다. 무안하고 당황했을 부모님의 마음까지도 다독여주는 이 귀한 말을 동생네가 듣고 왔다니 진심으로 감사하다. 안 그래도 사춘기에 접어들어 돌발 행동을 많이 하는 은바오 녀석을 살피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칠 이 둘에게 단비처럼 내려온 따스한 말에 내 마음까지도 보드랍게 몽글거린다.
한마디 말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보드랍게 어루만진다. 말의 힘, 식집사로 다짐한 아침의 마음이 교장선생님 덕분에 더 견고해진다. 이쁜 말 하면서 하루 보내야겠다 다짐해 본다. 가령 수학 문제 다 틀린 아이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