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탄 것들을 위한 애가

by Bono




길을 걷습니다. 바스락거리며 바람이 태운 간지럼에 몸을 흔드는 잎들의 소리를 귀에 담아봅니다. 저를 스치는 햇살의 온기를 누리는 이 순간이 좋습니다. 웃자란 마음이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던 시간들을 나무가 덜어낸 잎들이 달래줍니다. 가지에서 떨어진 잎들이 보여주는 말없는 순응과 들숨으로 밀려 들어오는 청량한 바람으로 다독이는 산책. 요즘 제게 가장 절실한 것이었던 일인가 봅니다. 마스크를 벗고 해바라기처럼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혀 크게 심호흡도 해봅니다. 배 뽀오옥 내밀고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갈비뼈가 닿을 정도로(요... 욕심이었군요. 흉내 내면 안 되겠어요. 이 생에서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숨 끝에는 어떤 욕심도 성냄도 분도 없습니다. 더 느리게 호흡하며 자연을 눈과 마음에 담으며 붙들고 싶은 순간들은 카메라로 저장하고 걷다 보니 무량사 경내로 가는 길과는 반대편인 산책길로 들어서게 되었죠. (늘 샛길로 빠지는 건 대체 어디에 숨겨진 본능인지...)


연일 뉴스에 보도되는 리비아 홍수로 인한 참사를 접하는 요즘입니다. 생명이 숫자로 치환되는 순간들이 두렵습니다. 실종자, 사망자 사이 간극과 숫자로 표기된 이들의 삶이 연결되어 있는 남겨진 이들의 삶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워지죠. 슬픔은 목울대를 넘어가 명치끝에 걸려 아무리 두드려도 내려가지 않는 체기로 남았습니다.


예고된 기후변화들로 인한 피해에 대처하지 못하고 속수무책 쓰러지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이미 멸종되어 버린, 혹은 멸종되어 가는 중인 동물들의 삶을 떠올려 봅니다.


좌 : 흰눈썹 황금새 우 : 반달가슴곰 - 진관우 작가




길로 빠지게 된 건 이런 상념 끝에서 본 꽃무리가 손짓하는 모습에 홀렸는지도. 호랑나비들이 꿈인 듯 날아다니고 바람이 흩어낸 풀잎들 위로 윤슬처럼 부서지는 빛가루를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갑니다. 오늘은 일부러 음악도 듣지 않습니다. 제 귀에 들어오는 자연의 소리들을 듣고 싶어서 이어폰을 꺼내지 않았죠. 그런데 걷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죠. 너무도 적막하더라고요. 어린 날 산에 오르거나 숲에 들어가면 저를 반기던 새소리, 청설모가 뛰어가던 소리, 작은 벌레들이 꿈틀대는 모습에 화다닥 내려와 채어가는 사냥꾼들의 소리, 바람에 사부작사부작 춤추던 나뭇잎들과 실개천이 흘러내려가며 바위에 부딪혀 튀어 오르던 물소리까지...


모든 것들이 음악을 듣는 것처럼 다채로웠던 그때의 소리들이 지금 제가 걷는 이 숲길에서는 들려오지 않더란 말이죠. 분명 저기 개천도 있고, 울창한 나무들도 있고 이 공간만큼은 제 어린 날과 비교해 보았을 때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이 이 소리들을 죄다 사라지게 만들었을까요?



디디우스모르포 나비를 그린 "나비야" - 진관우 작가





얼마 전 읽은 기사에서 진관우 작가의 "숨탄 것들"이란 그림 시리즈를 떠올렸습니다. 핸드폰을 사용해서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 이름을 한글로 쓰며 글자를 이용해 동물의 형상을 그려내는데, 독특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에 정말 감탄이 나오더군요. 동국대 바이오환경과학과 학생이자 전역을 앞둔 군인 신분인데, 벌써 여러 환경단체들과의 콜라보를 통해 자신의 그림을 알리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 제인 구달이 운영하는 환경재단 활동에 우리나라 대표로 뽑혀 참가도 했던 이력이 있는 멋진 청년이 자신의 솜씨로 지구상의 숨탄 것들을 아끼고 보호하며 또 한글까지 널리 알리고자 하는 취지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더군요. 과학 잡지 뉴스 펭귄에 실린 그의 인터뷰 기사 중 그가 이런 종류의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와 철학에 대한 질문에 답 중 일부를 발췌해 왔니다.



"<기록하면 기억할 수 있고, 그 기록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준다>. 우리의 기억은 대상이 많이 노출되거나 하나의 기록물로 남았을 때 마음과 머리에 오래 남는다.

비단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도, 자연도 결국 우리가 그들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다면, 이들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면... 언젠가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동물들의 이름을 많이 기억하고 불러주고 알아줘야 이 친구들이 우리 곁에 남아있을 수 있다. 한국어의 음소는 단어 의미를 구별하는 가장 작은 단위다. 하지만 그중 하나라도 사라지면 단어를 체계화할 수 없고 의미가 바뀌게 된다.

자연에서도 같은 맥락의 일이 일어난다. 만약 커다란 생태계에서 생물들이 하나씩 사라진다면 ‘멸종’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돌보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 뉴스 펭귄, 남주원 기자와의 인터뷰 중


좌 : 레서판다 우 : 반딧불이
멸종위기종 아홀로틀 - 진관우작가





우리가 잊어가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된 요즘, 잊혀 가는 것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사람들에게 환기시켜 같이 보호하자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어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살아있는 생명들 모두를 일컬어 작가는 "숨탄 것들"이라 말합니다. 우리 또한 그 일부겠죠.



자연의 소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음악도 대체할 수 없는 지구 본연의 숨소리라 생각하거든요. 그 숨소리를 잊는 순간, 우리가 설 땅도 사라지고 우리 또한 다음의 지구나 역사를 꿈꿀 수 없기에 이렇게 지속적인 환기와 공동체 형성으로 지켜가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사라진 소리들이 돌아오는 날이 멀고 더디더라도, 있는 것들부터 지키면서 그날이 올 수 있기를 준비하고 노력해야겠죠.




혹등고래 - 진관우 작가





오늘의 산책에서처럼 적막한 숲이 아닌 풍성한 소리들이 저와 함께 했던 어린 날의 숲이 다시 돌아오기를 꿈꾸며 가만히 더 멀리 돌아니다. 그 소리를 같이 지켜줄 사람들을 꿈꾸면서요.





지구수비대 : 이똥옥 작가


숨탄 것들을 위한 애가 : 이똥옥













* 같이 듣고싶은 곡


Franz Schubert Octet in F Major, D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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