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마타 넉줄고사리를 받았다. 토끼털처럼 보송보송 돋아난 솜털이 달린 뿌리가 밖으로 자란다는 이 녀석의 생명력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포자 번식이 아닌 러너라고 불리는 뿌리를 통한 줄기의 자람이 독특한 식물이다. 가지런하고 정갈한 조그만 잎들의 배열은 특히 햇빛 아래 그림자로 자리할 때 더 빛이 난다.
어릴 적부터 들로 산으로 뛰어나가 온갖 식물들을 만져보고 코에 대어보며 파브르 곤충기에 버금갈 똥오기 관찰기를 꿈꾸던 내가 항상 오래 머물던 자리는 어린 고사리들이 여린 빛에 잎을 흔들며 자라나던 나무 아래나 바위틈 등이었다.
가지런하게 뻗어 나오는 잎들과 가녀린 손목을 가진 여인이 우아하게 내민 손처럼 뻗어 나온 줄기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여름에는 모기들을 팔과 다리에 상주시키며 캐어와 뒷마당에 심어보다 엄마의 등짝 스매싱으로 결리는 등판의 통증과 함께 다시 있던 자리에 가져다 묻어주기도 했다.
식집사를 자처하며 다육이 개체 수 늘리기에 매진하다 이제 점점 눈길이 후마타 고사리와 같은 지구의 생명체 중 가장 오래 살았을 녀석들에게 간다. 이들과 함께 늘 푸르고 싶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라려고 뻗어나가는 촉수와도 같은 뿌리들을 닮고 싶은 나의 은밀한 욕망이 발현되는가 보다.
며칠째 10주년 정기공연 연주회를 위한 서류 작업을 하느라 잠을 설쳤더니 눈이 뻑뻑하다. 이물감을 달래 보려고 고사리를 보았더니 잎이 홀로그램으로 둥둥 떠서 내 앞을 오간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 마음에 바람을 통하게 만들어 줄 바람길을 찾아 나선다. 동생과 함께 지리산 노고단 트레킹을 하고 온 친구의 여행 이야기도 듣고 싶고, 청양에 있다는 김인중 신부님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빛섬갤러리>에도 가보고 싶어 함께 청양으로 달려갔다.
친절한 네비양의 불친절한 길 안내에 몇 번의 급정지를 한 뒤 콘벨트라 이름한 카페에 도착했다. 이곳에 스테인드글라스로 전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는 신부님의 작품이 있다니. 설레는 마음으로 갤러리 안으로 들어선다. 널찍하게 뻗어있는 공간의 벽을 따라 다양한 색채들과 형상으로 채워진 그림들이 눈에 띈다.
김인중 신부님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던 날이 떠오른다. 쉼 없이 일하는 워커홀릭으로 변해버린 나, 일에서 느끼는 권태가 극에 달해 있을 즈음 여러 가지 일들이 같이 겹치며 숨 쉴 틈이 보이지 않아 스스로 살갗에 아가미를 새기듯 어둠을 응시하고 있던 밤이었다. 어둔 생각들이 밀려들며 마음의 그늘 속 거미줄이 사방으로 번져가던 때 스스로를 환기하기 위해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들을 검색했다.
동생과 함께 간 스페인 여행에서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안 스테인드 글라스로 그려진 성화들을 투과해 쏟아져 내리던 다양한 빛의 프리즘에 압도당해 한참을 올려다보았던 순간의 느낌이라면 마음속 어둠도 몰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찾아보던 작품들 속에서 처음으로 그분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독특한 방식의 표현법과 파리의 도니미크 수도원의 수도사로 종신하며 평생을 남을 위한 삶을 사신다는 분의 이력이 눈길을 끌었다. 196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 쟈크마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그다음 해 사제서품을 받으셨다고 한다. 화가로서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때 사회적 부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받아들인 소명의 무게는 이후 스테인드 글라스 속 다양한 형상과 색들로 세상을 밝히기 시작한다.
흰색의 캔버스 위에 푸른색이나 붉은색의 유화물감으로 올려 시작하는 그림을 그리시는데, 물감에 테러빈유나 건성용 용해제인 린시드 오일을 많이 섞어 물감의 농도濃度를 묽게 해서 마치 붓이 지난 자리를 따라 색들이 화면 안에 서서히 잠입하게 만드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을 사람들은 때론 서양화와 동양화의 접목이라 평하는데 서예 붓부터 나이프, 스퀴지 등을 혼용해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백색의 화면을 채워 하늘의 빛이 어둠을 덮고 몰아내는 색채의 향연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 밤도 그랬다. 한참을 보고 또 보았던 그림들 속 빛들이 내 눈과 마음에 스며들어 자는 동안 고여있던 어둠이 용해되어 아침 햇살과 함께 사라지게 만들었다. 화면 속에서만 보았던 그림들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다.
"만일 천사들이 그림을 그린다면 그들의 예술은 틀림없이 김인중의 그림과 같을 것이다. 눈부시고 빛나는 아름다움, 자유로움에 흠뻑 젖어 있는 것과 같으리라. 색채와 형태들은 독특한 진실의 힘에서 나오는 듯하고 김 신부의 작품은 창조되었기보다는 기도의 깊이에서 솟아 나온 듯하다."
- Wendy Beckett Sister
플랫 화이트 한잔을 마시며 공간과 그림 배치에 대한 탐색을 마친 뒤, 안쪽 제일 깊숙한 갤러리 공간으로 들어간다. 마치 신부님의 육성과도 같은 글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이 말이 제일 마음에 남는다.
"그렇게 맛난 과일을 주던 무화과나무가 나이가 들어 밑동을 잘라냈습니다. 잘려나간 그루터기는 얼마나 오랫동안 열매를 맺었는지 연륜을 드러냅니다. 멈출 줄 아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 빛 섬에 꽃비 내리거든 : 김인중 신부, 원경 스님 공저 파람북 P.41 중
빛에 따라 달라지는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다양한 숨결들이 녹아든 화폭 위 그림들을 보며 걷던 중 귀에 익은 음성이 가벽 넘어 들려온다. 벽 너머 영상관이 있는 줄 알았다. 그곳에서 다큐멘터리 "천사의 시"를 방영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나직하고 생생한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점점 내 눈이 커졌다. 호기심에 발끝을 들고 가보니 세상에 사제복을 입고 있는 신부님이 앉아계신다.
인터뷰 중이셨다. 프랑스에 계시는 분이 올해 8월 카이스트 초빙석학교수가 되셨다더니 잠시 이곳에 오셨는가 보다. 소형으로 타일처럼 제작되어 벽에 빼곡하게 놓인 그림들을 둘러보는 척하며 공간 안으로 들어선다. 마치 물방개처럼 빙글빙글 느릿하게 주변을 돌며 귀는 온통 인터뷰 중인 곳으로 쫑긋 세워져 있다.
아이돌을 보아도 별 감흥 없이 그저 "우리 동네에 늬들이 어인 일이니?"라고 했던 나이다. (물론 속으로) 그런 내가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다가가 인사를 드리고 sns를 열어 신부님을 영상으로 만났던 날의 기록을 보여드렸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떨면서 말이다. (손 떠는 건 덤이었고) 믿기지가 않는 순간이다.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때론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것이 삶이라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인자한 미소, 나직한 목소리, 귀가 어두워지셨다며 상대방의 말이 잘 들리지 않을 때에는 한 손을 귀에 대며 고개를 갸웃하시는 모습이 정말 정감 있고 소탈하게 다가왔다. 보폭이 작으신 편이라 오종종 걸으시는 뒤를 따라 중앙일보 기자님에게 직접 해주시는 작품 설명을 들으며 걷고 있으니 꿈만 같았다. 종교를 넘어서 <빛 섬에 꽃비 내리거든>이란 친구가 선물로 건네주는 책과 엽서세트까지 선물 3종세트 같은 날. 오랜만에 찍어보는 쉼표가 있어 하루가 온전해진다.
건강하세요. 신부님. 오래도록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47 - 양인모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