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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Sep 26. 2024

곰곰, 다시 곰곰






 
 벌써 4시간째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내일이 수학시험이라 낮부터 와서 틀렸던 문제들을 되짚어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문제 푸는 속도가 아주 많이 느린 3명만 남았더랬죠. 다른 아이들은 오고 가는데, 저 아이들은 마치 정물처럼 가만히 붙박이로 앉아있다는 사실이 문득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폼나게 흔들면서,  
"일루 와. 요 똥강아지들. 슨생님 카드 줄게. 들어는 봤나. 슨쉐이 카드! 가서 밥 먹고 와. 먹고 싶은 거 많이 먹고 힘내서 들어와. 한 사람당 만원씩이야!"라고 일부러 내보냈어요. 머뭇거리며 카드를 받아 들며 이래도 되나라는 표정으로 망설이던 녀석들을 억지로 등 떠밀어 내보냈어요. 20분 뒤에 파리바게뜨에서 8400원 썼다고 문자가 오네요. 겨우 이거 사 먹고 무슨 힘이 나서 공부를 한단 말인지. 요 아이들이 철없이 정말 팍팍 쓰고 들어오는 녀석들이면 좋겠어요. 이 소심쟁이들. 한없이 순둥순둥한 녀석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내내 눈에 밟힙니다. 잠은 조금이라도 자고 학교 가는지 걱정돼서요.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 맥주 한 캔 손에 들고 가만히 영화채널을 뒤적이다 제라르 꼬르비오(Gerard Corbiau) 감독의 1994년 작품 <파리넬리>에 시선이 멈춥니다. 대학교 때 친구와 비디오방에서 이 영화를 보고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나서요. 그때는 비디오방이란 곳이 있었어요. 지금 세대들은 모르는, 그런데 어감으로 따지면 굉장히 어색해진 공간이 되어버린 곳이죠. 한 세대가 다른 세대와의 접점 없이 오로지 자신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문화를 갖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일까요, 아닐까요? 대학로에 돈벌이 목적이 아닌 그저 영화가 좋아서 만들었다던 사장님이 있어서 그곳에 자주 갔더랬죠. (그런 추억 있으신 분요. 왼손 검지 살짝 드셔라~)


<파리넬리>는 18세기에 활동한 카를로 브로스키(Carlo Broschi, 1705-1782)의 생애를 그린 영화예요. '카스트라토(Castrato)'는 지금은 사라진 거세된 남자 성악가를 뜻하죠. 성대가 굵어지기 전 거세를 해(아, 너무 거침없이 이야기할라니까 목이 막혀요. 쿨럭)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하되 육체와 폐활량은 성인의 것이 되어 크고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전혀 다른 성의 목소리에 홀린 이들의 열광에 음성이 아름다운 아들을 둔 가난한 부모들이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아이를 카스트라토로 만들려고 했다죠. 18세기 이탈리아에서 1년에 4천여 정도의 어린 소년들이 거세되었대요. 엄청난 숫자죠. 탐미적 욕구와 계층 상승에 대한 헛된 희망이 만들어 낸 슬픈 시대상이 반영된 인물들입니다.


영화 속 파리넬리는 후천적으로 거세된, 그것도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는 형의 독단에 의해 그리된 인물이. 아름다운 목소리와 놀라운 외모, 완벽한 감정 표현으로 무대에 오르는 그는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스페인의 필립 5세의 병도 낫게 할 만큼의 독보적인 기량을 가진 카스트라토가 되죠. 하지만 헨델이 이런 그를 비웃었대요.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지만, 형인 리카르도에 의해 그가 저급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못마땅해서요. 헨델이 오페라 작곡을 그만두고 오라토리오 작곡만 주로 하게 된 이유도, 파리넬리를 자신의 곡에 출연시키지 못해서란 말도 있어.


영화 속 가장 백미인 장면이 바로 헨델의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를 부르는 장면이죠.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2막에서 여주인공 알미레나가 부르는 아리아. 적군의 여왕 아르미다의 포로가 된 알미레나가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며 풀려나길 기원하는 이 노래를 파리넬리가 부를 때. 모든 이들이 그의 목소리에 빠져들게 돼요.


영화 속에서 파리넬리가 갈등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노래를 위해서만 살게 된 그가 자신도 모르게 내몰린 운명을 한탄하며, 무대 위 찬사를 벗어나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철저하게 외롭고 힘든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길 바랐더랬죠. 사람들의 찬사는 그의 목소리, 예술적 재능에 국한되어 있기에 그걸 떠난 그저 인간 자체인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이들에 대한 갈증이 클 수밖에 없었던 그가 자신을 폄하하던 헨델을 응시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이 노래와 배우의 눈빛이 오래 남아요.


지금은 카스트라토 대신, 카운터 테너란 파트가 있다는데 영화 속 주인공의 목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당시엔 카운터 테너 '데릭 리 레이긴'이 부른 저음부와 소프라노 '에바 마라스 고드레프스카'가 부른 고음부를 디지털로 합성했다고 해요. 울게 하소서에서는 소프라노의 울림이 더 크고요. 여러 번 들어도 마음을 붙드는 울림이 있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자신들이 향유하는 문화, 지속적으로 쫒는 아름다움을 위해 얼마나 탐욕스러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또 그런 것들을 누리고 계속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착취하는지에 대해서도요. 그러다 문득 이렇게 사회적으로 거세당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들에게 생각이 이어졌죠. 우리 아가들이요.









독일의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의 가장 큰 화두가 "비판 교육"이죠. 교육의 중점이 사회에 "적응", 또는 "순응"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라 배웠던 저이기에 기존 체제에 적응하는 법이 아닌 "비판"이 교육의 핵심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더랬죠. 독일의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제1장의 제목은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는가?'에요. 문학 텍스트를 읽을 때 옳은 해석이란 것이 있는지에 대해 먼저 깊이 사유해야 한다는 걸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며 시작해요. 우리가 이 시는 몇 연 몇 행, 시적화자 어조는 무엇, 핵심 구절 밑줄 쫙을 하고 있을 때 이들은 시를 처음 대하는 학생들이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읽어낼 것인가 다양한 사고의 확장을 유도하며 거시적으로 접근하게 만들고 있더라고요.


단답형, 오지선다형도 드문 그들의 평가법도 흥미롭죠. 이번 고등학교 1학년 수학과정이 집합, 명제, 함수라는 파트인데 명제 파트를 가르치면서 제가 답답함에 죽을 것 같았거든요. 사고의 흐름을 따라 반례 등을 직접 들어보며 이 명제가 왜 옳은지에 대해 고민해 보려고 하는 아이들이 드물거든요. 해석이 아닌 암기를 먼저 하려고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들이 그들에게 교육이란 이름으로 사고의 거세를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란 두려운 생각도 듭니다. 요즘 부쩍 말이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럼없이 낼 수 있을까? 내는 법을 알고 있을까? 거북이처럼 목이 굽어 책상 위 주어진 일감에만 몰두하고 있는 건 아닐지. 시험 보느라 지쳐가는 녀석들이 눈에 보이심 가만히 안아주셔. 엎드려 자고 있으면 살짝 담요도 덮어주고 30분만 기다려주셔요. 등짝 게 때려서 자는 애들 경기 나게 만드시지 마시고요. 어쩌면 아이들이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사랑해", "네가 있어 행복해", "조금만 더 먹어", "조그만 쉬렴" 이런 말들일지도 몰라요.


오늘,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씩 건네며 하루를 닫기로 해요. 가을이 다가오고 있어. 소리 없이 깊어가는 가을 맑게 울리는 귀뚜라미 소리를 싣고 온 바람결로 기분 좋은 요즘입니다. 그래도 감기는 꼭 조심하시고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파리넬리 - 헨델의 리날도  울게 하소서


https://youtu.be/JIr9v4gK4Uk?si=EhHZDtpNvNxmAHi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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