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결말인 영화를 볼 때면 그날의 감정선에 따라 결말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그렇죠. 어떤 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 해석하다 또 어떤 날은 '무슨 이런 빌어먹을 사랑을 또'라고 오락가락 정의하게 되더라고요. 평형을 모르는 시소 같아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말이죠.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시나요?
중세시대 귀족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며 노트르담의 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된 인물이 있습니다. 후에 스토아학파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아벨라르는 파리 대성당 성직자 퓔베르의 조카딸 엘로이즈를 우연히 보게 되었죠.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그녀에게 반한 그가 자청해 그녀의 스승이 되죠. 당시 여성으로 드물게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고 영리했던 그녀에게 그는 여태껏 자신이 등한시했던 사랑이라 표현할 수 있는, 그러나 인정하지 않은 감정을 감추고 할 수 있는 모든 범주의 지극한 열정을 쏟아붓죠.
사랑이 깊어지자 아벨라르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스트랄라브를 누나에게 맡기고, 엘로이즈를 수녀원에 보내요. 그가 신학을 더욱 깊이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세상에서의 잊힘을 선택한 엘로이즈. 하지만 그녀의 가문, 특히 처음 조카딸을 소개했던 퓔베르의 분노는 이들의 비밀결혼 소식에 극에 달해 급기야 그를 거세시켜 버립니다. 이후 교수직에서도 쫓겨나게 된 아벨라르는 생 마르셀의 조그만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수많은 저서와 적극적인 제자 교육으로 당대 지식인들의 많은 호응과 비판을 동시에 받게 되었죠.
그들의 사랑을 서사시로 노래한 알렉산더 포프의 작품에서 엘로이즈가 화자가 되어 어린 수녀들을 보며 읊는 시가 나오죠.
"결점 없는 수녀의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세상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잊히니.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모든 기도를 받아들이고, 모든 바람을 체념하니."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이 시에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제목이 나왔다고 해요.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읽은 미셀 공드리 감독이 천재 각본가라 칭송받는 찰리 카프만에서 대본을 의뢰하면서 말이죠.
영화는 지극한 외로움과 허무함으로 아침을 시작한 조엘을 비추며 시작해요. 그는 어느 날 무미건조한 일상에서의 탈출을 시도해요. 회사행이 아닌 몬탁해변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른 거죠. 펼쳐진 공책엔 낙서 아닌 낙서들로 가득하고, 군데군데 비어있는 공간들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그는 몬탁해변에서 계속 동선이 겹치는 초록머리의 여인을 만나요. 생그럽고 당돌하고 그리고 대화가 잘 통하는 여인이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 그들은 그날밤을 같이 보내고 곧 연인이 됩니다.
선택적 고립과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조엘과 외향성에 사교적인 클레멘타인. 그들은 곧 싸우기 시작하고 그녀와 화해하기 위해 클레멘타인이 좋아할 만한 목걸이를 들고 찾아갔던 조엘은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며 젊은 남자와 키스를 하는 클레멘타인에게 충격을 받고 그 이유를 찾게 되죠. 그건 다름 아닌 사랑의 후유증으로 너무도 괴롭던 그녀가 자신과의 기억을 삭제하기 위해 "라쿠나"라는 회사에 다녀왔다는 것이었어요. 조엘은 그녀의 행동에 심한 배신감을 느껴요. 한때는 사랑이었고 지금은 뒷맛이 지독하게 씁쓸한 식어버린 커피처럼 되었어도 모든 기억을 깨끗하게 그녀가 삭제해 버렸다는 것에 분개한 조엘도 똑같이 기억 삭제를 결심하죠.
공드리 감독이 '공들여' 만드는 이 장면이 흥미로워요. 기술자들이 직접 찾아와 시공(?)을 하는데 도구들이 너무나 지극히 평범하거든요. 파마 할때 쓰는 것 같은 헬멧을 장착하고 한숨 자면, 기술자들이 등장해 밤새 기억 삭제 프로그램 신청자가 잠을 자는 동안 그의 기억을 현재부터 과거까지 지워가죠. 클레멘타인에 대한 권태와 지속된 다툼으로 지쳐있던 조엘의 현재 기억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요. 화면이 흔들리며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져 가는 공간, 사람, 사물들이 이채롭게 표현이 돼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간들로 회귀하자 조엘은 자신들이 나쁜 기억만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아요. 급기야 이 기억만은 지우지 말아 달라 외치며 기억 속 클레멘타인의 손을 붙잡고 도망을 가죠. 때 아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연출되는 상황 속에서 흥미로운 건 조엘이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기억을 건들 수 없는 곳인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선택해 숨어버리는 장면이었어요.
기술자들이 그곳을 쫓아올 수 없는 이유가 뭘까요? 바로 한 번씩 자신의 어린 시절 상처들을 솔직하게 꺼내 보이며 조엘과 나눔으로 치유를 하고 위로를 받길 원했던 그녀와 달리 조엘은 자신에 대한 것들을 그녀와 나누지 않았다는 점이죠. 소통의 부재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계속된 다툼에 지쳐버려 사랑했던 기억마저 지워버리고 싶은 이유가 된 거죠.
조엘의 기억을 삭제하는 장면에서 라쿠나 회사의 하워드 박사와 매니저인 메리가 나누는 대화가 나옵니다. 메리가 저 시를 읊는 장면이죠. 시를 소리 내 읊은 그녀는 하워드 박사를 사랑하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그에게 입맞춤을 시도해요. 그 장면을 창문 밖에서 하워드 박사의 부인이 목격하고요. 부인을 달래기 위해 달려 나가는 하워드 박사, 그리고 같이 달려 나온 메리에게 부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죠. "그냥 네가 가지렴. 전에도 그랬잖니?"라고요. 하워드 박사를 사랑했던 메리가 어긋난 사랑에 대한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그에게 자신의 기억을 삭제해 달라고 했었단 사실이 드러나며, 그럼에도 그녀가 다시 하워드 박사를 사랑하게 된 지금의 현실을 보여주죠.
묻고 싶습니다. 사랑에도 궤도가 있을까요? 기억이 삭제된 후, 그들의 만남이 반복될 때. 수많은 갈림길과 선택들이 교차함에도 끝내는 너이고 너여야만 한다는 정해진 종착역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복잡한 플롯을 통해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되짚어 장면들을 떠올리는 순간 맞춰지는 조각들에 전율했죠.
고고학에서 "라쿠나"는 잃어버린 조각들이라는 뜻이라죠. 기억의 조각들을 잃어버렸던 그들에게 회사가 상담 중 상대방의 결점을 이야기하는 서로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건네는 장면이 나옵니다. 감정의 극점에 이르러 상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내고 싶어 끌로 깊게 새겨 넣는 것만 같은 날 선 목소리들을 듣게 된 그들. 상대의 말을 들으며 혼란스러워하는 표정들과 낙담한 표정들이 심한 다툼 후의 우리들 모습으로 오버랩돼요. 사랑이 무조건 핑크빛만은 아닌, 그 감정이 소진된 후 남은 찌꺼기 같은 시간들을 보여주는 섬세한 심리묘사가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죠. 결국 함께 하기를 선택하는 마지막 장면과 함께 영화가 끝이 나고 또 한 번의 결말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해 곱씹는 중입니다.
사랑했던 연인들이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 시드는 것도 사랑이어 서일 까요? 사랑이 운명이라 그런다면 그게 정말 로맨틱한 일일까요? 사랑했던 기억이 저장된 공간은 어디이기에 기억을 지웠다는 저들은 다시 같은 길로 걷기를 원하는 걸까요? 질문이 많죠? 물음표가 도깨비바늘처럼 여러분 마음속에 걸리는 순간, 마음속 단면 어디쯤이 펼쳐질까요.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사물의 향이 짙은 우디향을 품고 있습니다. 서늘해진 코 끝에 스미는 바람결 사이로 잠들지 않은 소리들이 더 선명해지는 밤.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라는 을유문화사의 책으로 굳어진 가슴을 몰랑몰랑하게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