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기 전이면 엄마는 늘 우리 삼 남매를 목욕탕으로 끌고 가셨죠. 번데기의 탈피(?) 혹은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눈만 큰 막내는 누나를 언니라 살갑게도 부르며 따라 들어왔죠. 지금 시대면 신문 사회면에 날 일지도 몰라요. (쉿, 그때만 허용되던 이야기예요.) 요 녀석은 항상 아주머니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어요. 정말 예쁘게 생겼었거든요. 과거형이란 걸 기억해 주세요. 지금은 한 번씩 쳐다보다 놀라요. 저도 모르게, "너는 누구?" 이렇게 묻곤 해요. 5살 정도에는 이 녀석의 천진하고 해맑은 미소 덕에 여기저기서 얻어 온 바나나 우유로 우리들은 동산 같은 배를 내밀고 집으로 돌아왔죠.
어린 날의 기억 덕분인지 마음을 다잡는 일이 생기면 어른이 되어서도 목욕탕에 가고 싶어 져요. 말갛게 씻은 얼굴로 꼭 그만큼 밝게 새날을 살아보자 다짐하던 순간이 좋았거든요. 온통 환한 빛들만 가득한 내일을 그리던 어린 날이 좋았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새벽비를 맞으며 근처 24시 사우나에 들어가니 이른 시간인데도 욕탕 안 증기를 뚫고 탈의실로 새어 나오는 입담 좋은 목소리들이 벌써 귀를 한가득 채웁니다.
물결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은빛 비늘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생명의 퍼덕거림으로 말소리들이 물결 져 오더군요. 그 소리의 리듬을 살피며 탈의를 합니다. 하나 둘, 거추장스럽던 껍질들이 사라지고 점점 가벼워집니다. 서늘한 욕탕 안 돌바닥에 발을 딛는 나는 보티첼리의 비너스. (음, 그래요. 그건 아니죠. 그 아래 작은 소라게라고 정정할게요. 저도 양심은 좀 있거든요.)
습도 높은 공기에는 각자의 향이 섞여 있어요. 인공의 향이 짙어 코 끝이 아릿해졌죠. 가벼운 초벌샤워를 마치고 탕 안으로 들어갑니다. 발끝부터 천천히 밀어 넣으면 더 힘들어요. 한 번에 목까지 잠기는 것이 온도에 적응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죠. 두 눈 질끈 감고 쑥 들어가 앉아버렸죠. 아, 이 아늑함이라뇨. 눈을 감았다 뜨니 오륜기 닮은 열탕 안에 앉아있던 그녀들이 일제히 저를 보고 있더군요. 새벽의 이곳은 이름 모를 그녀들만의 낙원이라 했는데 이방인의 겁 없는 침입에 일순 말문을 닫은 채 가만히 주시하더군요. 매서운 눈빛을 피해 구석으로 자리를 잡았어요. 걸친 것 없어도 의관 정제 흉내 내며 손을 살며시 휘저어 제게로 오는 물결을 밀어 보냅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죠. (제발, 저는 지금 소라게예요. 이곳에 사람은 없는 거예요!)
다행히 이 바람이 그녀들에게 들였으려나요? 별. 볼. 것. 없는 이방인이 안심이 된 듯 그녀들의 수다가 이어집니다.
-늬들은 있냐? 우리 집엔 미련미련 시상 미련한 소시키가 산단다
-그랴? 우리 집엔 망나니 하나 있지. 한번 붸줘?
-웜마, 그려? 우리 집엔 두억시니가 있는디, 내가 이겼네?
우아하게 재개되던 수다를 듣고 있으니 좀 있으면 소시키는 우시장에 도매급으로 넘겨 분골까지 끝내버릴 듯해요. 세상 우아하나 칼 같은 그녀들의 입담과 기세에 눌려 온탕 안에 몸을 깊이 밀어 넣었죠.
감고 있던 눈이 파르르 떨려와요. 저도 모르게 나올 뻔한 추임새 한마디를 얼른 삼키느라요. 입꼬리는 안으로 말리고 저마다의 서러운 날들을 구성지게 풀어내며 벌이는 설전에 정신이 혼미해지죠. 웃음을 참느라 한 번씩 탕 속으로 뽀그르르 가라앉기도 하느라 혼자 바빴어요. 열탕의 수압이 가슴을 누르고 그녀들의 삶의 무게가 발목을 잡아당기는 지금, 로마의 옛 공중목욕탕에서 벌어졌다는 그들만의 설전을 능가하는 삶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어요. 아, 이런 극적인 드라마가 어딨을까요?
-얼라, 어째 이리 탱탱혀 영감이 만좌 줘도 살맛이 이러지는 않을 텐데 누가 이래 만좌 줬나 나도 좀 만져나 보자아!
-소시키가 내 속 썩여 벌어온 돈 강남 가서 재건축하는데 썼다! 얼마짜린데 막 만져, 터져!
서슴지 않고 뻗는 손과 피하지도 않고 받아내는 몸. 그녀들끼리 부딪히는 찰진 살맛. 말맛.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속으로 다시 가라앉았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이 대놓고 웃을 수는 없잖아요. 점잖게 물속으로 잠겨든 소라게는 물방구만 연신 끼어댔어요. 언더 더 씨, 언더 더 씨!
-얼라, 야, 나 늦겄다아. 우리집 소시키 여물 주러 간다!
큰소리를 외치며 달려 나가는 그녀를 봅니다. 오래 앉아있었던지 홍반을 달고 서둘러 나가는 그녀의 몸짓 척추 아래 오목한 곳에서 시작해 흘러내리는 튼 살의 흔적이 보였죠.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 없는 곳이 남아 있어죠. 아무리 바꾸고 싶어도 쉽지 않은 누군가의 뒷모습에 맘이 덜컥, 이렇게 멈춥니다. 시계를 보고 놀라 서둘러 달려 나가는 엘리스의 흰 토끼. 어쩌면 저 모습이 그들만의, 우리 어머님들만의 오랜 사랑인 듯 다가와서 어여뻐 와락 안아주고도 싶은 뒷모습이었어요. 감은 눈 뒤로 오래 남은 인영을 떠올려 봅니다.
살아온 세월이 만들어내는 재단할 수 없는 서로의 삶의 방식이 날 것으로 튀어나오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어디 있을까요? 민낯으로 만났기에 허위도 허식도 없이 꺼내놓는 삶을 엿봅니다. 그저 삶의 오래 묵힌 때를 밀어내고 가벼워진 몸피로 나가는 곳이 아니에요. 어쩌면 사느라 잊고 있었던 사람 사는 냄새가 그리운 날이면 찾아갈 곳이 여기라는 걸 알게 되었죠. 이분들의 구성진 입담을 기록한다면 수필집 한 권은 거뜬할 이야기판, 그녀들의 소중한 Thermae. 바나나 우유 하나 손에 들고 미소 짓습니다. 세상 사랑스러운 우리의 어머님들을 떠올리면서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권진아 : Something's Wrong
https://youtu.be/LqT-Xy-5zcg?si=gD3Xr03lhcQTxXfu
*오천 수영성과 그 일대의 바다. 그리고 청보리 사진을 올렸어요. 누군가의 푸릇했던 젊은 날을 떠올리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