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여인을 처음 보았을 때, 난 숨이 막혔다. 광막한 어둠이 여인을 짓누르듯 하늘에 자리하고, 발 밑은 곧 꺼질 것만 같은 모래투성이의 사막 한복판에서 한 여인이 우두커니 앉아있다. 그녀는 곧 생을 마감하고자 어떤 행동을 할 것만 같은 비장한 표정이었고, 왼편의 모래사구 뒤에는 사나운 눈빛의 늑대 3마리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만일 생을 포기하려는 어떤 행동 하나라도 한다면 그녀는 늑대들의 밥이 될 것만 같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전해져 온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 빛나는 둥근달, 월관이 오른편 하늘을 밝힌다. 신의 목소리처럼 그녀를 감싸는 달빛. <황야의 여인>, 그녀는 삶에 대한 지극한 위로의 목소리를 달빛을 통해 전해받는다.
무하의 아내가 러시아 전통의상을 입고 모델이 되어 준 그림. 이 그림을 통해 무하는 1921년 러시아 대기근으로 고통받고 있던 러시아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위로를 전하고 있다. 체념한 듯 털썩 주저앉아버린 여인 뒤에 빛나는 달무리, 신의 목소리 같은 아름다운 하늘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뒷이야기를 그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로 그녀의 내일을 이어가게 만드는 희망을 꿈꾸게 만든다. 알폰소 무하의 슬라브 민족 서사시 중 한 편인 <황야의 여인>. 이 그림을 통해 나는 진짜 무하를 알게 되었다.
그가 20년에 걸쳐 완성한 말년의 <슬라브 대서사시> 그림들을 무하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찾아보게 되었고, 그가 상업포스터 작가에서 자신의 민족을 위해 모든 걸 바친 진정한 순수 예술화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보았다. 그가 죽었을 때, 슬라브 민족은
"영원히 평화 속에서 편히 쉬거라.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는 프라하의 별이 되었다."
라는 연설문을 통해 그의 죽음을 기렸다. 나치의 삼엄한 통제에도 무려 1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고 하니 무하가 일깨워 준 그들 마음속의 자긍심이 얼마나 큰 것인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아르누보의 대가, 다양한 산업 전반에 한 획을 그은 아름다운 그의 작품이 이곳 에이메현 마쓰야마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포스터를 보았다. 마쓰야마성을 방문하고 길을 따라 쭉 걷던 중 발견한 시립미술관 앞에서 만난 커다란 현수막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서울 전시를 예약해 놓은 터라 언제 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고 있었는데, 마치 선물처럼 내 눈앞에 펼쳐진 현수막이라니. 망설임 없이 들어가 표를 구매해 입장했다. 일본어 해설이기 때문에 번역기를 사용해 계속 확인을 해야 했지만, 다행히 유명한 원화들은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그림을 보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의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루의 일정을 표로 만들어 놓고 체크를 해도, 시간마다 발생하는 변수들로 언제든지 바뀌게 된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에 하루의 발자국을 살펴보면 시간을 따라 직선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어디쯤에서는 끊어져 있다, 어디쯤에서는 갑작스러운 상승, 혹은 하강으로 변곡점들이 찍혀있다. 그러기에 때때로 신에게 나의 운을 바라고, 매 순간 내게 당신의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서 다음 일을 기다리며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불안으로 손바닥에 흥건히 맺힌 땀을 닦느라 정신이 없기도 한다.
내가 제일 많이 하는 불안한 상상 중에 하나는 계단을 내려갈 때 내가 발을 헛디뎌 굴러버리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손에 물컵 혹은 음식을 들고 가다가 엎어버리는 일이다. 내향적이고 신중한 편이라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은(어릴 때 엄마 앞에서 밥상 엎은 건 제외하고) 거의 없는데도 늘 이런 불안은 어떤 새로운 일을 계획할 때마다 내 머릿속을 잠식해서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내게 스밀 때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떠올리고, 그 일을 하나하나 단계별로 해나가는 것에 집중한다.
"한 번에 하나! 하나씩만!"
나를 다독이는 주문이다. 이렇게 하나씩 집중해서 일을 하다 보면 불안이 사라지고 또 하나의 성취를 이루곤 한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상포진의 습격과 SK 정보유출 사건 등으로 여행길이 불안했다. 특히나 로밍이 되지 않아서 급하게 사용하게 된 e 심으로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는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험이 끝난 직후라 학부모님들이나 아이들의 연락이 많이 올 때였는데 이렇게 채널이 막혀버리니 답답함에 초조함이 몰려들며 여행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날 여행지에서 무하의 그림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우연처럼. 이 우연이 얼마나 나를 안도하게 하던지. <황야의 여인>은 비록 원화로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만들어 낸 색채의 향연에 빠져들어 내내 나를 괴롭히던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35살까지 무명이었던 그를 파리의 스타로 만들어 준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는 크리스마스날이지만 인쇄소 당직근무를 하던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크리스마스의 기적과 같은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아 들기 전까지 수많은 습작과 연구를 해오던 그의 성실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의 열정과 노력들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된 크리스마스날 밤. 그는 얼마나 기뻐하며 소리쳤을까?
그리고 50살이 넘어서는 모든 부를 포기하고 순수예술 화가가 되겠다 선언하던 그. 억압받고 고통받는 조국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며 침체된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도전한 그의 노력들은 볼수록 눈부시고 아름답다. 언젠가 프라하에 간다면 길이 8m에 달한다는 그의 <슬라브 대서사시>를 직접 가서 보고 싶다. 하루 종일 거대한 그림 아래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었던 화가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당신이 지나갈 때
문이 저절로 닫히는 어두운 복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두 개의 문을
최대한 늦게까지 열어두는 것이지요.
-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인터뷰 중
오늘이란 또 하나의 문이 닫힌다.
내일을 향해 열려있는 복도를 따라 잠잠히 걷고 또 걷는다.
느린 걸음의 달팽이.
내일은 또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 같이 듣고 싶은 곡
이루마 - If I could see you again
https://youtu.be/3ILFt0QbeMM?si=a630UcOQxk4TNLwC
#마쓰야마
#알폰소무하전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