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목조건물을 프레임을 통해 바라본다. 명도와 채도가 렌즈를 투과하는 빛의 양에 따라 저마다 다른 색으로 다가온다. 내 마음에 와닿는 채도와 명도를 찾기 위해 조리개를 조절해 본다. 지금 이곳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의 화살이 내 그림자를 모자이크로 쪼개놓는 오후 3시. 높게 떠오른 해가 한국보다 훨씬 길게 하늘에 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적도에 가까울수록 자전은 빠르다고 했는데 나의 체감속도가 고장 났는가 보다.
덕분에 내 보폭도 똑같이 느려진다. 길 가에 붙어있는 수기로 적힌 전단지의 글씨를 읽어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자전거 뒤에 실린 하루만큼의 그 사람의 그림자를 눈에 담아도 본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들을 통해 저마다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며 걷는다.
저만큼 앞에서 두 명의 아이가 걸어온다. 비슷한 키의 두 아이는 손을 꼭 붙잡고 서로에게 무언가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다면 뒤에서 따라가며 엿듣고 싶은 충동까지 생긴다. 사랑스러운 미소가 한가득 담긴 말은 어떤 내용일까? 가만히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내게 천진한 미소를 건네는 아이들. 두려움도 없고, 가식도 없고.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이 순수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찰나의 순간 스치는 미소를 입에 머금고 아이들의 뒷모습을 찍어본다. 내가 자신들을 찍는 줄 알고 뒤를 돌아보기에 한 손을 들고 인사를 건넨다.
"예뻐, 너희들이 너무너무 예뻐!"
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소리 내어 말해본다.
드디어 미쯔코시 백화점 옆의 오카이도 상점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구글맵을 꺼놓고 양 옆을 둘러보느라 나의 고개는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골든위크를 맞이한 이곳도 제법 많은 인파가 몰려 붐빈다. 흥겨운 분위기와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식당이 예약을 안 하면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게마다 연이은 착석 거절로 슬슬 오기가 생긴다. 위장은 이제 꼬르륵을 넘어서 곡소리를 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정녕 사람의 소리렸다?'
오카이도 상점가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런 곳이라면 충분히 가게 입장을 공략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안되면 가게 앞 너구리(장사의 신으로 일본 가게 앞에 많이 있는 조각상)처럼 붙박이로 서서 움직이지 않을 테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이자카야 한 곳을 유심히 지켜보다 문 앞에 섰다.
"스미마생!"
큰소리로 나의 도착을 알렸다. 배고픔에 예민해진 내 목소리가 제법 컸던가 보다. 일하고 있던 젊은 청년들이 한꺼번에 나를 쳐다본다. 깜짝 놀란 표정에 살짝 무안해졌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자리 없다고 또 거절당할 것 같다. 눈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선다. '없다고만 해봐라.' 의지는 전해지기 마련이다. 눈빛으로. 신속하게 자리가 마련된다. 예약이 없으나 먹겠다는 나의 의지가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작전 성공! 너구리 변신은 안 해도 되겠다며 눈 밑의 다크서클을 물티슈로 살짝 문질러 지워본다.
나는 하루토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는 조리대 앞의 탁자로 안내받았다. 말을 모르니 대화는 힘들지만, 한두 마디씩 눈짓으로 짧은 영어로 나누는 대화 속에 즐거운 저녁식탁이 차려진다. 배고프다는 이유로 식탐이 생겨버린 나는 오이무침, 어묵탕, 고등어구이, 닭 날개튀김 한 조각 등등을 시켜놓고 흥이 돋아 콧노래를 부른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흥해라, 흥해라!'
이자카야 안에서 조리하는 조리대의 연기들과 일하는 청년들의 활기찬 목소리, 그곳에 앉아 서로 이야기하는 이들의 웃음소리, 음악소리. 모든 것들이 섞여 들어 하나의 합창으로 다가온다. 서로 다른 비트의 박자지만 묘하게 어우러지는 신세계 교향곡에 나는 몸을 맡긴다.
'나도 저 때 저런 모습으로 웃고 있었을까?'
일하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젊음이란 이름으로 가장 빛나는 나이, 몸은 고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즐겁게 열심히 해나가고 있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 저들의 내일이 오늘보다 좀 더 편안하기를, 날마다 꿈이 있는 하루가 되길. 그리고 지금처럼 늘 웃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비록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해는 자취를 감추고 인공의 달빛이 한가득 거리를 밝힌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 음악을 따라 부르며 걷는다. 바람은 서늘하다. 지열이 사라진 도시를 걷고 또 걷는다.
Ob-La-Di, Ob-La-Da
삶이 이렇게 또 하루, 이어진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비틀즈 - Ob-La-Di, Ob-La-Da
https://youtu.be/olZM4q9V0K4?si=_ic7aaiH99tgYH3h
# 마쓰야마
# 소도시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