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까지 택시를 타고 도착한 뒤 간단히 짐을 풀고, 창문부터 열었다. 한 번에 밀려들어오는 이국의 향기와 소리들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된소리가 많이 섞인 스페인어의 날카로운 스타카토 음절들이 희미하게 들린다. 저들은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돌벽에 스며든 어둠이 보드란 결로 반짝이는 밤, 창가에 걸터앉은 우리는 무사히 도착한 기념주를 나눈다.
캔맥주에 한국에서 가져간 컵라면이 첫 끼니지만 조촐하게 차려놓은 공복 26시간 만의 식사는 빠르게 온몸에 스며든다. 시차적응을 위해 비워놓았던 속을 이렇게 채우는 이 순간 우리를 위한 만찬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식탁은 없을 듯하다.
"여행 온 우리가 할 일!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사느라 잊고 있던 우리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동생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가족들의 안부가 궁금하나 차마 연락을 못하고 제부가 남겨놓은 메시지를 연거푸 읽고 있는 동생의 주의를 바꿔놓고 싶었다. 엄마와 아내 이전에, 꿈 많고 여리던 나의 동생의 마음속 속살에 새겨진 그간의 이야기들이 정말로 궁금하다.
이야기 없이 지내는 건 북극의 툰드라나 얼음뿐인 바다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는 당신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드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 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p13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로의 아픈 날들을 회피로 묵인하며 살아왔다. 내 앞에 놓인 아픔이 더 크다 생각하며 살아내느라 버텨온다는 이유로 동생의 마음에 새겨지던 생채기들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했던 날들을 이번 여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다독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서로의 입장이 되어 어린 날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어른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자라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출항하는 배의 선미에 술병을 부딪혀 출발을 알리는 사람들처럼 기운차게 잔을 부딪힌 우리는 잔을 비우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부산스러운 사람들 발자국 소리와 차들이 오가는 소리가 알람이 되어 우리를 깨운다. 오늘은 마드리드 탐험의 날이다. 프라도 미술관과 솔광장, 산미겔 시장 등을 돌아볼 예정이다. 특히 고야의 그림이 보고 싶은 마음에 벌써 발끝은 붕 떠 있다.
날이 밝자 태양의 광장, 솔광장에서 우리는 이정표의 처음을 알리는 0km 표지를 찾았다. 이곳을 밟으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두 발을 모아 사진을 찍는다. 브로콜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은 곰동상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한참을 웃는다. 이 낯익은 뒤태라니. 엄마 잡고 조르는 은바오라며 서로 이야기하다 화들짝 놀라 말을 삼킨다.
당분간은 금기어인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낸다. 일상은 우리를 구성하는 원자가 되어 버린다. 가려놓을 수 없는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자들. 그러기에 더 소중하고 귀한 이름들이 되는 존재들에 대해 떠올려 본다. 떨어져 있으니 더욱 그리운 이름들.
시장기를 달래려 뽀르라스와 추로스를 입에 물고 솔광장 곳곳을 탐색한다. 복권 판매점에서는 하나 사볼까 하다 외국인이 당첨되는 경우 내야 하는 어머어마한 세금 퍼센트를 보다, 스페인 사람들의 당첨자 확률을 높여주는 일을 포기하고 마요르 광장으로 향한다. 도시 곳곳에 있는 쓰레기통까지 찍으려고 하는 나를 밀고 당기며 데리고 가는 동생의 미간이 점점 좁혀지기 시작한다. 어쩌겠는가? 이국의 풍경 모든 것이 내 오감을 자극하는걸.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보띤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고야가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도 했었다는 유서 깊은 식당으로 1725년 장 보띤과 그의 부인이 연 레스토랑이다. 헤밍웨이가 새끼돼지 요리와 와인을 먹었다 해서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세상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팔다리를 벌리고 있는 돼지를 보니 차마 주문은 못하겠고, 추천메뉴로 식사를 한다. 하루 한 끼만큼은 최고 좋은 걸로 먹기로 약속했기에 식탁 위 모든 음식들을 경건한 마음으로 음미한다. 추로스 탓에 와인보다 생맥주를 먹자고 했는데, 장이 예민한 집안 내력을 잠시 잊은 우리들의 선택은 이후 진땀 나는 일정을 만들게 된다. 이때까지는 고풍스러운 식당과 그 분위기를 누리고 있는 이들의 여유로운 몸짓과 미소들에 흠뻑 취해 그저 행복했다.
식당에서 나와 구글맵을 이용해 찾아간 마요르 광장으로 향했다. 4층짜리 위풍당당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1619년 펠리페 3세의 명으로 건설된 뒤 세 번의 화재를 겪었다는 이곳은 화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견고하게 그려진 벽의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다양한 주제들로 이루어진 프레스코화만 눈으로 더듬어 보는 일만 해도 즐겁다. 10년에 한 번씩 공모전을 통해 벽화의 내용을 다시 정해 그린다고 하는데, 다음번 이곳에는 어떤 그림들이 자리해 있을까?
광장의 한가운데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물들을 한 바퀴 쭈욱 돌아본다. 건물 하단부에 내부로 통하는 9개의 아치문들 사이 사방으로 보이는 풍경이 모두 하나의 액자처럼 다가온다. 어디를 가든, 어디로 향하든 길이 이어져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걸어보라 말하는 것만 같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치문 하나를 정해 조금 더 걸어보자 길을 나선다. 근처에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 마셔볼까 하고 가는데 동생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간다.
"왜 그래? 너?"
"어... 언니. 나 배탈 난 거 같아. 어떻게 해?"
점심에 마신 생맥주가 문제였던 거 같다. 갑작스럽게 복통을 호소하는 동생을 위해 나는 급하게 화장실을 찾는데 보이질 않는다. 그때 가기로 했던 스타벅스로 뛰어들어간 난, 화장실 위치를 파악하고 키를 달라고 요청했다. 태평한 얼굴의 종업원들은 먼저 주문을 해야 영수증 하단에 화장실 비밀번호가 적혀 나오니 그걸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되지도 않는 짧은 영어로 연신 오케이를 외친 난 주문완료와 함께 동생에게 달려갔다. 유럽인들의 매너는 화장실 밖에서 기다릴 때 절대로 노크를 하지 않는다 한다. 상대에게 큰 실례라고 하는데, 안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표시가 되어있지 않은 화장실 문 밖에서 마냥 기다리기엔 너무 큰 모험이자 혹독한 인내심을 요구하기에 나는 눈을 딱 감고 노크를 했다.
있다. 안에는 이미 누군가 천국을 맛보고 있었다. 그 천국문 좀 빨리 닫고 나와달라 요청하는 나의 다급한 노크 소리를 들었을까? 재차 눈 딱 감고 두드린 덕에 문이 열리며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나온다. 내 노크소리에 닫힌 천국문에 화가 났는가 보다. 콧김이 나오는 게 보이는데 동생이 잽싸게 문을 밀고 들어가며 아임 쏘리를 연발하더니 사라진다. 그 뒤 닫힌 문 뒤로 남겨진 난 남자분과 마주하고 서 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며 콧김이 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나는 순간 배를 움켜잡고 신음소리를 냈다.
"아야 야아 아 아. 아고고고고고."
로마의 휴일 속 오드리 헵번은 사자입에 손을 넣고 화들짝 놀라기만 해도 이쁜 그림이 되던데, 내 평생 그런 거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도 이번 여행에 있었는데... 마드리드의 똥오기는 남녀공용인 듯한 유서(?) 깊은 스타벅스의 화장실문 앞에서 이런 발연기를 하며 덩치 큰 정말 수소와 같은 이름 모를 남정네 앞에서 모른 척 넘어가 주길 바라고 있으니.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날 즈음 콧김은 사라지고 쿵쿵대며 저만치 간다. 다행히 머릿속에서 상상한 인종차별적 발언부터 시작해(상상이 너무 과했는지도) 두 눈 질끈 감고 방해해서 미안하다 두 손 모아 빌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을 모면했다. 고마운 사람 같으니. 다음번 당신의 천국문은 마음껏 열렸다 닫히기를 기원합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히 당신의 의지로만요. 아디오스!
큰 사고를 면한 동생의 편안해진 얼굴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문이 열리고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을 닦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서니 비상구 표지가 보인다. "Salida" 소리 나는 그대로 읽으면 "살리다".
"너를 살렸네. 살리다!"
"아재 개그는 이후, 울 오빠만 허락한다. 돼먹지 않은 개그 시전은 금지한다. 언니야!"
이런 돼먹지 않은 지지배를 보았나. 내 저를 위해 체면 포기하고, 낭만을 포기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발연기를 시전 했건만 돌아오는 건 이 한마디에 세상 숭헌 아즘개그라는 타박이라니.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던 옛 조상님들의 말씀을 떠올리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우리 자매는 스페인의 유서 깊은 스타벅스에 진한 발자취를 남겼다. 더 이상의 투어는 무리일 것 같아 배앓이가 진정이 될 동안 숙소에서 쉬기로 하고 돌아온 나는 낮동안 열심히 찍은 모든 사진들이 사라진 정말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살리다, 저 사진과 몇 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파일을 뒤져도 나오질 않는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너무 속이 상해 울상을 짓자 한국에서 싸 온 약들로 진정이 된 동생이 너른 마음으로 나를 다독인다. 밤마실을 나가보자며 말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발걸음은 마요르 광장을 지나, 산 미겔 시장을 거쳐 마드리드 왕궁의 야경과 성당을 걷는 긴 여정이 되었다. 서늘해진 기온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보며 걷는 우리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푸르스름한, 또는 황금빛 불빛에 잠긴 도시를 유랑한다.
다른 얼굴 다른 복식, 다른 주거환경에 살아도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지친 하루 끝을 덜어내려는 스스로의 다짐이 담긴 표정이나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서두르는 잰걸음의 뒷모습. 저마다의 하루가 닫혀가는 이 시간이 좋다. 태양이 달군 돌 위를 창백한 달빛이 어루만지며 식히는 또 다른 표정의 스페인. 이렇게 여행 첫날이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