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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톨레도 - 시간의 다리 위에서

by Bono





그날 우리는 그저 다른 방향으로 걸었을 뿐이야. 돌아선 너와 반대로 뻗어있는 길로 걸으며 돌아보지 않았지. 달이 바다 위 섬으로 숨어들어 해산을 할 동안만 기다리면 될 거라 생각했어. 늙은 염부꾼이 감아올리는 수차를 따라 밀물과 썰물이 스치는 그 한 번이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기억을 되돌려도 너는 오지 않았지. 난 기억의 여울목에서 멈춰서 있어. 빛나던 날들은 빛부스러기로 흩어지고 희미해진 만년필에서 새어 나온 잉크처럼 흐릿해져 가는 기억들이 발목을 감싸고 굽 도는 그날에 서 있지.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다 지친 밤 꿈을 꾸었던 거 같아. 저기 골목 태양빛에 달구어진 흰 벽 아래 오래된 스웨터와 끈 풀린 운동화를 신고 등을 기대고 졸고 있는 너를 보았던 것 같아. 지금 이대로 달려 나가면, 그곳에 앉아 나를 올려다볼 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이봐, 똥옥양?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너는 뉘 집 딸?"


한 번씩 상상이 지나쳐 유체이탈도 하는 나를 부르는 동생에 의해 나는 다시 톨레도 길 위로 돌아온다. 내 어깨를 툭 친 보드란 곰손의 어루만짐에 놀란 고라니 같은 난 손에 들고 있던 마사판을 떨어뜨렸다. 수녀님들이 만들어 드셨다는 이 지방의 전통빵이 발 밑에 뒹군다. 오리지널 송편모양이라 더 반갑게 산 빵인지라 주워 먹을까 순간 고민을 하다 온갖 인종이 뒤섞인 이곳에서 차마 땅거지가 될 수 없어 아쉬운 눈길을 거둔다. 손을 떠난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고여사 님의 가르침이 육성으로 생생하게 귓가에서 들려온다. (아, 엄마. 오늘치 생존보고 연락을 잊었다고 이렇게 등장하시다니!)



"이곳, 이상해. 돌벽에서 뻗어 나오나? 묻어둔 기억들을 건드려. 머릿속에서 캐내진 기억들이 사금파리처럼 앞에서 막 반짝여. 너는 안 그래?"


"마사판에 뭐 섞은 거 아녀? 여기 잊지 말고 다시 오게 하려고! 그나저나 언니 넌 누굴 떠올리고 그렇게 멍한 표정이 되는 거야? 누구 우우우? 웅? 말해봐, 비밀 지켜줄게. 응?


돼먹지 않은 동생의 애교를 손으로 밀어내고 산토 또메 성당으로 향한다. 여행자들의 길을 지켜준다던 크리스토퍼 성인의 가호를 덜 받았던가 부풀어 오른 기억의 포자들이 내내 나를 감싸고 떠돈다.



크리스토퍼 성인과 아기예수

톨레도 대성당 안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그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림 속 손가락 3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의미한다는 손가락 앞에서 난 함세웅 신부님을 떠올렸다. 붓글씨로 유명하신 우리나라 현대사의 증인과도 같은 이분의 글 아래 늘 낙관처럼 3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자신의 이름자 '세'를 이렇게 도식화한 낙관인데 되려 그 그림에서 나는 저 세 개의 상징이 "나, 너, 우리"라는 말로 읽혔더랬다. 당신과 나와 그리고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가 속한 이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 같은 기호라 믿는다. 그걸 잊어버린 지금의 세태에 대해서는 비겁하지만 침묵하며 눈을 돌린 나를 먼저 반성해야 할까? 크리스토퍼 성인 아래서 가만히 기원한다. 정말 이 3가지 모두 행복한 날들로 우리를 데려다 주기를 말이다.










골목을 굽 돌아 나오니 이슬람 사원이 보인다. 키 작은 이 건물이 바로 산토 또메 성당이라고 한다. 이곳이 유명해진 까닭은 화려한 색채와 정교한 묘사가 주가 되는 중세의 매너리즘 시대의 스페인 대표화가 엘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그림과 오르가스 백작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안드레스 눈예스의 요청으로 1312년에 사망한 백작을 추모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


성당 안에서는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에 오로지 눈에만 모든 색과 형들을 담았는데, 구름을 사이에 두고 나뉜 천국과 지상의 대비부터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묘사로 백작을 추모하는 그림과 마주 선다.



엘 그레꼬의 초상-본명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엘 엑스폴리오 - 예수님의 옷을 벗기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왜곡된 인체의 비례로 천상의 존재들은 한없이 신비하고 위엄 있게 그려내 그들이 직접 맞이하는 백작의 승천장면이 상부에 보이고, 지상의 육체를 매장하기 위해 내려온 하늘의 성인들 스테판과 어거스틴의 모습이 하단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성인들의 황금옷 하나하나에도 그들이 누 군인가를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숨어있는데, 거대한 화폭을 채우는 화가의 놀라운 묘사에 압도당한다. 국의 열쇠를 쥔 베드로부터 성모 마리아, 세례자 요한과 백작의 승천하는 영혼을 맞이해 주는 예수그리스도까지 등장하는 이 그림 속에서 신교파의 종교개혁도 중요하지만, 평생에 걸친 교리에 따른 헌신하는 삶 또한 중요하다는 걸 그림을 통해 강조하는 있는 엘 그레꼬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스페인은 종교개혁의 미명 아래 유대교인들을 마녀사냥에 몰아넣고 막대한 재산을 국가 소유로 취했으며, 가장 어두운 탄압의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이때 이러한 종교재판등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발전했을지, 톨레도 또한 어떻게 변모했을지 그림을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섬에 갇힌 채 자신의 세계를 완성한 엘 그레꼬에 대해서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기록되어 시간이 멈춘 채로 살아가는 것도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귀한 삶의 목적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가능성에 대한 모든 탐색의 길이 막힌 채 고인 물로 남아버린 건 아닐지 후회하는 이들에게 지금 이 도시의 석양빛은 어떤 색으로 다가올까?




무데하르 양식이 남은 푸엔살리다 궁전을 지나, 걷고 또 걷는다. 내리기 시작한 비로 뒤집어쓴 우비가 귓가에서 사각이며 바람소리를 전한다. 톨레도 파라도르 고성호텔에서 늦은 점심까지 먹은 우리는 한참을 또 걷다 시내로 향한다. 이제 기차를 타고 세비야로 떠날 시간이다. 인자한 미소의 성모 마리아상과 조용한 인사를 나눈다. 제 기도, 잊지 말아 주세요. 꼭.











* 같이 듣고 싶은 곡


정미조 : 개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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