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에서 렌페를 타고 마드리드 마토차역에서 환승해 세비야로 두 시간 반, 기차를 통해 스치는 스페인의 풍경은 짙은 초록이다. 거대한 향고래의 숨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 같은 물줄기가 꼭 올리브나무로 피어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지금 내 숨은 어떤 색일까? 연초록의 막 돋아난 올리브 나무 잎색이면 좋겠다. 겨울의 긴 숨을 몰아내 제일 먼저 봄을 맞아 뿜어내는 생명의 숨결에 깨어나는 자연의 색깔. 현실은 타이트한 일정에 슬그머니 내려앉기 시작하는 눈 밑 다크서클이 판다가족을 부르고 있지만.
톨레도를 벗어나 도착한 세비야는 마치 중세에서 현대로 타임슬립을 해버린 기분이 드는 곳이다. 거대한 세비야 대성당에서 황금의 탑과 강물에 비친 조명의 화려한 색들이 눈길을 빼앗고, 고성 옆을 지나가는 최신식 트램의 모습은 지나치게 이질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시간대들이 트램의 길을 따라 페스츄리의 결처럼 층층이 나뉘어 있는 것만 같다. 달라진 풍경 속 요소들을 찾는 일. 여행자의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
톨레도 파라도르에서 한 점심식사 덕에 저녁은 간단한 타파스와 와인 한 잔으로 해결하기로 한 우리는 제법 이름난 소극장의 플라멩코 공연부터 보고 강변을 따라 세비야 대성당 뒤 타파스 거리에 가기로 했다. 밤바람이 이곳에 오니 제법 따뜻하다. 처음으로 여행자를 어루만져주는 스페인의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의 입김을 누리는 기분이다.
히랄다탑
세비야대성당
왕립 담배공장의 극장에서 하는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는 관계로 택한 차선책으로 황금의 탑 근처 소극장거리로 향한다. 바로 눈앞에서 무용수들의 땀방울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구두굽 소리와 캐스터네츠 소리를 듣고 싶었던지라 아쉽다.
9세기 이슬람과 13세기 몽골족의 침입으로 터전을 뺏기고 계속 북진한 집시들이 서유럽에 약 1000만이 넘게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 스페인에는 안달루시아 지방에 가장 많이 거주하며 약 75만 명이 살고 있다는데 18세기 이들에게서 탄생한 플라멩코는 이러한 이주와 방랑문화의 집약체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춤이 바로 플라멩코다. Cante(노래), Baile(춤)
으로 이루어진 구성에 1860년부터 1910년의 플라멩코 황금시대에 Togue(기타) 기타가 추가되면서 세 가지로 정착이 되어 전승 중이다. 격렬한 리듬과 애조 가득한 노래가 대조적인 춤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살짝 흥분도 된다.
1950년 왕립 담배공장이 들어서며 감옥 같은 수용소에 보초병까지 두고 담배사업을 적극 육성하던 스페인. 19세기에 들어와 노동자가 여성으로 대체되어 1948년 현대식 기계를 사용하는 담배공장이 설립되기까지 담배를 공장에서 밀반출하던 걸 막기 위해 파놓은 깊은 해저드부터 붙잡힌 이들을 가둬두는 수용소까지 갖추고 운영되던 왕립담배공장의 위용을 본다. 지금은 세비야 대학의 인문대학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조그만 감옥들이 교수 개인연구실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 장소에 대한 의미부여는 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란 걸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란 조바심도 살짝 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오래된 건물에 대한 보존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인상 깊은 건물 몇 개도 떠올려본다. (아... 순간, 머릿속이 암전!)
6월이 되면 정말 짙은 분향으로 가로수에 아름다운 보라색 꽃들이 핀다고 한다. 그 꽃 향기에 마음이 끌린 사람들이 붐비고 있을 이 거리는 또 얼마나 예쁘고 붐빌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 유명한 곡인 '하바네라'를 흥얼거리며 골목을 걷는다. 어스름한 저녁빛에 감싸인 공장의 외부와 거리의 모습들 사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카르멘, 그녀의 발걸음의 무게는 어땠을까?
우리나라에서 국립 오페라단에서 무대에 올린 연출가 폴 에밀 푸흐니의 <카르멘>이 떠오른다. 1막부터 4막까지 성당 첨탑이 무대 위쪽에 등장해 관객을 내려다보는 구도 아래 당대 여성들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발랄하고 쾌활하며 거침없는 카르멘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녀의 몸짓, 손짓은 온갖 기교로 가득하고 목소리 또한 매혹적이다. 이국의 언어로 노래하는데도 온전히 전달되던 목소리에 배어있는 카르멘의 열정이 보는 내내 나를 매혹시켰다. 이름도 잊어버린 무용수지만 어둔 무대 위에서 빛나던 눈빛은 잊히지가 않는다.
불이었던 그녀가 사회체제의 부당한 대우 앞에 점점 꺼져가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사랑이란 이름 앞에 무너져가는 한 영혼을 목도하던 때,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경험한 오페라였으니 그 후유증이 꽤 오래갔다. 특히 투우 경기가 열리는 4막에서 승리에 취해 환호하며 노래하던 투우사들이 무대를 빠져나가면 혼자만의 세상에 따로 놓인 카르멘을 붙들고 애걸하는 호세가 나온다. 그녀를 둘러싼 창살 밖에서 간절한 사랑의 간구를 하지만 그를 외면하는 카르멘으로 인해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지고 결국 창살을 넘어서서 카르멘 앞으로 다가온 돈 호세는 칼로 그녀를 찌르고 만다.
다시 자신이 속해 있던 창살 뒤의 세계로 돌아간 돈 호세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카르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배우들의 열연 덕분인지 사랑에 대해 가장 설레고 뜨거운 상상들로 가득할 나이에 본 카르멘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은 초연 후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사회의 비주류였던 집시가 여주인공이며, 그녀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나니 그걸 보고 있는 관객들의 항의가 빗발쳤겠지 싶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라 생각하는 사랑의 속성 중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엇갈린 마음으로 인한 상처 혹은 나를 받아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원망 등을 이 작품을 통해서 고스란히 느끼게 되어서이지 않을까? 나 또한 오페라를 보고 난 뒤 나오면서 떠올린 노래가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었으니 말이다. 지옥불같이 뜨거운 사랑은 개나 줘버려! 라며 같이 보러 갔던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맹목적인 사랑에 대한 위험성을 논하던 치기 어린 날들도 생각나며 피식 웃음이 난다.
동생과 나 사이 좁은 탁자 위 신비한 색깔의 칵테일을 한잔씩 올려놓고 드디어 플라멩코 공연을 관람한다. 마룻바닥을 두드리는 구두굽 소리에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하고, 캐스터네츠에 따라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친다. 어두운 무대 위 조명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무용수들의 붉은 입술에선 거친 호흡이 터져 나오며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조명빛에 산란하며 깊은 물속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난다.
애절한 노래와 기타 소리를 따라 나는 들판을 떠도는 영혼이 되어 유랑한다. 음악이 멎고, 조명이 꺼지자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 온전한 몰입으로 이 무대를 즐겼던가 보다. 세비야의 밤은, 황금의 탑을 따라 번져오는 음악소리로 깊어간다.
이국의 언어들이 노랫소리로 들려올 만큼 이제 여행길이 조금 익숙해졌나 보다. 있는 집 자식처럼 부내나게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여유 있게 음식을 고르는 이 밤. 우리는 세비아의 달빛에 물들어 간다. 청남석으로 짙게 덧바른 밤하늘을 머리에 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