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의 정간보

by Bono





겨울을 밀어낸 봄이 움트는 자리, 제일 먼저 고개를 내밀어 소식을 전하는 곳이 있었다. 조카 은지의 유치원 졸업식날. 온 가족 출동 명령을 내린 고여사님 덕분에 달려갔다.


10명 남짓의 아이들이 동그란 빵모자를 쓰고 졸업가운을 입은 채 제법 의젓하게 앉아있다. 정성껏 준비한 유치원의 프로그램들 속에서 아이들이 지내 온 시간들을 가만히 살피다 웃음이 난다.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을 위해 쓴 편지를 낭독하시는데 지켜보는 모든 이들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내 안에 봉인된 순수를 깨어나게 만드는 순정한 마음들이 너무도 따뜻하다.


가족사진을 찍으며 가운데 선 오늘의 주인공 은지를 보며 다짐한다.


'은지야, 고모가 네 우산이 되어줄게. 언제나... 언제까지라도.'









조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부푼 마음으로 돌아오다 얼마 전 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생각이 이어졌다.


카카오맵에서 세조의 무덤이 있다는 광릉에 연일 별점 테러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정말 기발한 방법으로 세조를 질책한다.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세조 재위 기간 동안 세상을 떠난 수많은 이들을 위로하는데 마음을 보태고 싶은가 보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왕. 세조. 그의 책사 한명회. 18살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노산군 이홍위. 그런 그를 지킨 엄홍도.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 그리고 240여 년이 지난 후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위시킨 숙종. 이들 사이에서 홀로 남겨진 여인 단종비, 정순왕후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녀는 판동령부사 송헌수의 딸로 15세에 단종의 비가 되었다. 처음 간택 당시 삼촌 수양대군과 양녕대군등이 강행한 세자비 간택에 불만을 표한 단종이 그녀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녀가 계유정난 이후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단종을 지키며 그와 함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내일을 묵묵히 견뎌낸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끝내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영월로 유배를 보낸 뒤 3개월 만에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 송 씨는 이후 궁녀 몇 명과 함께 청룡사 근처 정업원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한다. 친정은 아버지 송헌수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처벌받아 멸문지화를 입게 되었기에 돌아갈 곳조차 없었던 것이다.









세자빈에서 노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어 궁녀들의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업원 뒷산에 올라 단종이 있던 곳을 향해 곡을 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훗날 영조가 그녀가 올라 남편을 그리던 곳에 동망봉이라는 글자를 새겨 비석을 세웠다 하는데 그곳이 채석장으로 바뀐 뒤 비석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세조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내렸다는 곡식과 집도 모두 거부한다. 낙산의 샘물(자지동천)에서 명주에 보랏빛 염색을 하고, 옷감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자신의 성은을 거부한 그녀에게 대노한 세조가 어떤 누구도 그녀를 돕지 못하게 명령까지 내렸다 한다. 그러자 마을 여인들은 그녀의 집 근처에 여인들만 올 수 있는 작은 채소 시장을 열어 관아의 눈을 피해 송 씨에게 음식을 전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허경이라는 법명으로 82세의 나이

까지 살아간다. 무려 5명의 왕이 바뀌는 조선의 역사를 지켜보며. 마침내 세상을 떠난 그녀는 남편 단종의 곁이 아닌 시누이였던 경혜공주 시댁 해주 정 씨의 선산에 묻히게 된다. 그녀의 무덤 뒤 소나무들이 동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토록 닿기를 바라며 그리워하던 마음이 무덤 옆 다른 생명들에게도 닿았나 보다. 마침내 종묘 영녕전에 그녀의 신위가 모셔지고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무덤에는 "사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역사는 남겨진 이들을 쉽게 잊는다. 능동의 주체라 생각한 이들이 기록한 행간에는 오를 수 없는 이름들. 수많은 변곡점과 변수가 만들어 낸 각각의 삶의 정간보를 채워가야만 하는 우리들 삶에서 정순왕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준다.


모든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비극 앞에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위엄을 지켜가며 살아가려고 한 의지.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의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저들의 연대가 내 마음에 숲이 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도 삶의 연대가 어떻게 한 사람을 바꾸고 성장시키는지를 말한다. 파편화된 개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의 힘.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되길. 그럴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













* 같이 듣고 싶은


김나영 - 봄 내음보다 너를



https://youtu.be/fO36kiw-bUE?si=bNZSFe5RnxEhuBQ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