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접점

한복 입은 남자

by Bono




해망산을 향해 난 창에 쏟아진 햇살이 안방 문 입구에 닿는다. 겨울 끝자락 아마도 오후 3시, 어린 왕자가 여우 앞에 닿을락 말락 잰걸음으로 종종 대며 은빛 사구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을 즈음. 난 배를 대고 엎드려 아빠의 목침을 가슴 아래 고이고 책을 읽고 있었다. 노비 출신으로 세종대왕에게 발탁되어 품계의 수직상승을 보여준 한국사 전무후무한 신분상승의 신데렐라. 장영실의 생애를 다룬 위인전이었다.



전 세계 위인들의 업적과 생애를 읽게 되면 우리도 위인이 될 거라 굳게 믿은 엄마는 하루 종일 망부석처럼 한자리에 앉아 조개를 까서 번 돈으로 책을 구입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사주신 책들은 엿 바꿔 드시거나 딱지치기 판의 훌륭한 상비군으로 사용하셨다는 외삼촌들의 제보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왼손에 든 날렵하게 벼려진 조개칼로 허공을 두어 번 휘저으면 그들은 갑작스레 시선을 돌리며 아래동네 풍경을 살피는 척을 하곤 했다.


여하튼 우리들에게 읽기를 강요하신, 자신의 어린 날과는 상당히 괴리가 큰 엄마로 인해 나는 행복했다. 주문한 책을 받아 박스를 여는 순간 코 끝에 밀려들던 새 책 냄새. 첫 장을 열 때의 설렘. 가끔씩 책의 내용을 물어보는 엄마와 동생들에게 신이 나서 마치 내가 그 사람이라도 된 듯 연기까지 해가며 말해줄 때는 이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여사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마법의 주문패치가 이때 장착되었달까?



한 번은 위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어린 날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을 목록화해본 적도 있었다.

1. 남과 다른 신분 ㅡ 보통 평민 이하

2. 특정 분야의 독보적인 재능

3. 보통 이상의 끈기와 집중력

4. 조금 더 특별한 상상력

5. 실패를 겪고 난 뒤의 마음가짐


이 외에도 30가지 이상의 목록이 있었으나 비루한 나의 기억력이 복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100권짜리 한 세트의 위인전기를 읽고 나서 내가 쓴 일기장의 글귀랄까?


"죽을만치 힘들어도 살자. 살다 보면 뭐든 되겠지!''







조선시대 천재적 능력으로 다양한 과학기구를 발견해 사람들의 삶에 많은 기여를 한 과학자 장영실. 그도 이런 다짐을 했을까? 1442년, 세종에게 만들어 바친 가마가 부서져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 이후로 장영실의 생에 대한 언급이 조선왕조실록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왕이 신하의 욕을 했다는 것까지 기록하는 디스패치의 밀착취재 버금가는 세밀한 관찰자들의 기록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야사에서는 장영실을 아낀 세종이 자신의 딸과 야반도주를 시켰다는 말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는 것이기에 실제적으로 그는 역사 속에서 지워진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바로 그 부분에 의구심을 표한 한 PD로부터 시작한다. 이상훈 작가의 2014년 작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창작뮤지컬에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피디 진석은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에 나타난 복장의 특징과 그림 속 사인 등을 면밀히 분석하며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장영실이라 확신한다. 거기에 비망록까지 제보받으며 그의 확신은 힘을 얻게 되는데...


노비 신분이었던 장영실이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는 장면부터 시작해 갖가지 고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들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꿈을 좇아 도전하는 과정이 1막에 펼쳐진다. 그가 설계한 비차와 신기전, 천문기구들. 그리고 세종의 한글 창제까지 조선 전기 역사 속 굵직한 사건들이 빠른 속도로 전개되다 장영실의 조선 탈출 장면에서는 몰입도를 최고조로 이끈다. 정교하고 화려한 무대장치와 영상과 조명, 주연들의 노래까지 새롭게 만나는 뮤지컬의 장면들로 눈을 뗄 수가 없다.



1막 하이라이트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 전동석

https://youtu.be/O7YZ71_czrk?si=0-gM6G4E40FP5qvH






2막은 등장인물들의 공간을 바다 건너로 확장시킨다. 장영실이 중국 유학을 갔을 때 세계 여행을 다닌 정화를 만나는 장면이 1막에 등장한다. 고장 난 천문기구로 인해 항해를 하지 못하고 있던 정화를 도와준 장영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조선을 탈출한 그는 정화의 배에 올라 5년이란 시간을 거치며 이탈리아에 닿는다. 조선과 중국, 로마와 피렌체. 현대와 과거가 교차하며 다양하게 바뀌는 무대 배경까지 섬세하게 펼쳐지며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의구심은 어느새 '그랬겠구나!'라는 공감으로 바뀌게 된다.




장영실 메인테마곡

비차 - 고은성

https://youtu.be/PJN4ezusipI?si=xgIA3tsKwO5HUISZ






말도 안 되는 애국심의 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장영실이 피렌체에서 꼬마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고 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과학기술을 전수하며 생을 마감한다니... 진석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무산시킨 이들의 생각도 이러하다. 서방의 가장 뛰어난 천재라 칭송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이 장영실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그들은 학술 발표회에 등장해 이 사실을 알리는 진석과 그의 동료들의 말에 강력한 반발을 한다.








조선전기에만 있었던 양식의 한복을 무려 200여 년 가까이 지난 상태에서 루벤스가 그렸다는 점. 스승의 그림을 모사해서 그리며 배우고 연습했던 당시 학습풍토를 고려해 본다면 루벤스의 스승이 직접 이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장영실이 설계한 다양한 과학기구들과 다빈치의 설계 속에서 발견되는 유사점들이 이러한 연결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문학적 상상은 다양한 파장을 낳고 다양한 변이를 통해 울림을 준다. 한 권의 소설이 열어준 무한한 상상의 지평은 자신만의 별에 닿아 조용히 사라져 간 장영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게 만든다. 보는 내내 영실의 테마곡 속 노래 가사에 빠져들어 울고 있던 나.


나만의 별이 무엇인지, 그 길을 가는 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내내 묻게 되던 순간이었다. 아직도 매일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기에 노래 속 가사가 더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충무아트센터에서 장장 3개월 간의 대장정을 마친 <한복 입은 남자>. 그들의 완주를 기록하며 지방으로도 이 공연이 널리 이어지길 기원한다. 저마다의 가슴속 별들의 반짝임을 느껴보는 시간들이 많아질 수 있길...



세종의 메인테마

카이 - 너만의 별에

https://youtu.be/Oy-Cyi5fseM?si=KOweDgEf8YLVvt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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