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화

by Bono






"다 모였는가?"


자신을 향해 원을 그리며 둘러 서 있는 동기들과 친우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향화의 눈빛이 살짝 떨린다. 1918년 조선기생보감이라는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수치스러운 책이 시중에 나와 사대부 오입쟁이들의 철없는 입방아에 그녀의 이름이 안주거리가 되었을 때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던 그녀였다. 해어화라 부르며 자신들을 보고 웃어라, 채워라, 춤춰라, 번잡스레 요구하며 킬킬대는 남정네들 입이 더 가볍고 경박해지니 눈 둘 데가 정녕 하늘아래 한 곳도 없다 대놓고 그들에게 퉁박을 주던 당찬 향화. 그녀가 지금 떨고 있다.


기미년 1월 고종 황제가 일본인들에게 독살을 당해 승하하셨다는 비보가 들려오자, 동료들을 이끌고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달려갔던 향화였다. 그곳이 어디라고 가느냐며 아무리 행수가 만류해도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에는 나무비녀를 꽂고

"이 나라의 백성이 임금을 잃
었는데, 어찌 통곡하지 않겠소?"

엎드려 곡을 하던 그녀의 모습을 지금 이 앞에 모인 여인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향화의 눈떨림
하나까지도 눈에 담으며 서 있는 그녀들의 움켜쥔 종주먹 사이 숨겨진 손톱이 희게 바란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힘주어 쥔 손끝은 색을 잃어가도 지금은 잊힌 역사 속 짧은 한 줄로만 기록된 여인들의 눈빛만큼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얼마 전, 정조 임금께서 지으신 사적지 화성행궁의 앞마당에 생겨나는 것들에 대한 흉측한 소식을 행수어른께 전해 듣던 날었다. 건강검진을 빌미로 자신들에게 치욕스러운 성병 감염유무를 확인하는 자혜의원의 개원 소식을 들은 뒤로 향화는 한 번씩 깊은 한숨을 쉬곤 했다. 심중 깊은 곳에 꿈틀대는 분노가 터져 나올 방향을 잡지 못하고 한숨과 함께 안으로만 더욱 깊어져 갔다. 야금야금 이 땅을 파고드는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술자리에 모여 갓 머리 올려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동기들의 치맛자락을 거침없이 파고드는 무뢰배 같은 손길들처럼 손속 두지 않고 거침없이 유린하는 중이다. 굳게 닫혀 있던 빗장 틈으로 기웃대던 그들이 본격적으로 항구에 발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게 식간에 달라져 버렸다.


일본 고위급 간부를 데리고 그녀가 있던 곳을 찾아왔던 어리숙한 양반집 아들 정빈 도령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디서 따라서 입었는지 모던 보이 흉내를 내며 입은 양장이 어색하기 그지없던 김준기 대감의 아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비의 권세가 이 땅의 권세로, 그 권세를 볼모로 꼭두각시놀음에 놀아나는 숱한 양반네들의 모습이 참으로 볼 만하는구나란 생각에 조소가 지어져 그저 허탈하게 웃고 말았던 밤. 그런 그녀의 조소에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이던 풋내기. 그런 풋내기들이 일본이란 승냥이 등에 올라 천방지방 날뛰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요즘 향화는 스스로 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중이다.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쉽사리 답을 찾지 못하는 그녀의 눈은 방 안 가득 차려진 거나한 술판 위 허공을 더듬고 있다.


그때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드는 한 마디 말이 왁자지껄 한 술자석, 세상일은 잊어버린 짐승들의 난장판으로 다시 그녀를 끌어내렸다. 어린 도둑놈들이 흥건하게 술에 취해 어린 동기를 더듬으며 하던 말에 기가 차 뜯고 있던 거문고를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던 향화는 다시금 솟는 분기에 손을 꼭 쥐었다. 그들을 향해 솟구치는 살기로 눈앞이 화로 속 불씨처럼 발갛게 달아오른다.

"조선의 여인네들은 겁이 보통 없는 게 아니오. 저 아래 시정잡배 같은 시골 것들이 모여 서울 일을 흉내 낸다고 또 만세를 불렀다더군. 그때 잡힌 주동자가 형무소에서도 내내 뻗대며 자기가 무얼

잘못했느냐고 따진다지?"

"영감, 어린 여학생이라 들었는데, 그, 그곳으로 끌려갔단 말입니까?"

"독한 것들이 잠시 숨 좀 돌리려고 하면 모여 앉아 또 만세삼창을 한다고 일을 벌이니, 쓸데없는 생각을 못하게 뱃속에 대일본제국의 영광스러운 씨앗이라도 심어놓고 입을 다물게 해야겠소이다. 낄낄낄. 그럼 죽으로 가만히 앉아 입 다물고 있지 않겠소?"







어깨치마라고 한복까지 고쳐 입고,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옷고름이 풀어져도 속살 하나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행진하던 어린 여학생들에게 서슴지 않고 총구를 겨눴다는 일본인들의 만행을 듣고 있노라면 머리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쓰고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 마당에 나와 홀로 서 있는 아득한 느낌이 다. 눈앞의 일들을 지켜보는 오감만 발달한 생명체가 되어버린 것만 같아 발 딛고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어지럼증이 인다. 어린 그녀들을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들이 하나도 없음에 대한 자책, 그리고 할 일이 있음에도 찾지 않는 것은 아닐까란 한없는 부끄러움이 그녀의 가슴에 얹혀, 잠을 잘 수가 없다.


엎드려 매질을 당하는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 나온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그날, 그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지. 그렇게 끌려간 어린 학생은 어찌 되었을까 늘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다. 그런 그녀들의 용감한 행동이 이놈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종의 우월성과 정신 개조를 들먹이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 거나하게 취해 더러운 입김을 뿜어내고 있는 이들의 안줏거리가 되고 있다니. 온몸이 부들대며 떨리기 시작한다.


'너희들이 욕되게 한 건 이 땅의 겉 껍데기일 뿐이다. 이 땅의 여인들, 그들이 지켜 온 이 땅의 정신은 더럽히지 못할 테니. 언젠가 반드시 쫓겨갈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고야 말게 내 기필코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날 이후로 향화는 더욱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난에 팔려 와 호된 군기 속에서 기예를 닦아오며 살아온 그녀들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또 어떤 일들로 나라를 걱정하는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 일이 일어나고 나서 자행될 고문들과 핍박을 견딜 힘이 자신에게 있을지를 생각했다. 자신이 없었다. 앞장선 내가 모든 짐을 지고 가더라도 뒤따라 나온 이들에게 어떤 해가 가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아니 어쩌면 능히 상상할 수 있기에 마음은 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두렵고 떨리기만 했다.








통고장이 날아왔다. 19년 3월 29일, 또 한 번의 치욕스러운 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의원으로 가야 한다. 짐승의 생식기를 검사하듯 함부로 헤집는 손길로 인해 1차 검진 후 몸에 이상이 생긴 여인들이 더러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검진이란 이름의 추행이 자행되는 자혜의원 뒤켠으로 끌려가 험한 일을 당한 여인도 있다 들었다. 그러기에 2번째 검진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며 용기를 낸 여인들이 향화에게 몰려들었다. 이 어린 여인들과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그녀들의 목소리를 온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열흘 전 진주기생들이 만세 삼창을 불렀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읽은 바, 이 일로 고무되어 우리도 같이 나라를 위해 일어서자 흥분해 있는 이들과 함께 있는 향화는 거세게 뛰는 맥을 다스리며 말을 꺼낸다.


"얼마 전 있었던 탑골 공원 만세운동도, 아우내 장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도 다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을 터. 작금의 나라 소식을 듣고 있노라면, 우리 역시 가만히 앉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 앞에서 가무를 할 수 없는 일. 오늘 우리의 걸음을 다른 이들이 무어라 말하든지 간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을 모은 이들 중에 우리들도 있었다는 걸 후손들이 알거라 믿네. 지금 마음속에 무섬증이 생긴 이들, 집에 있는 식 속들이 해를 입을까 걱정이 되는 이들은 모두 물러서도 좋으니 괘념치 말고 그리들 하시오."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향화의 목소리는 한시를 읊고, 창을 할 때 보다 더 힘 있게 사람들 귀로

스며들었다. 아무도 뒤로 물러서는 이들이 없었다. 마당 중앙으로 모여있던 33명의 여인들은 대문을 넘어 길을 나섰다. 정갈하지만 길거리를 오가는 양인들보다는 화려할 수밖에 없는 옷차림의 여인들이 한 무리를 지어 길을 나서자 많은 이들의 눈길이 닿는다. 차분하게 길을 걷던 그녀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정네들, 남편들 눈을 가리며 길을 재촉하는 여인들, 때 묻는 맨발로 서서 더벅머리를 긁으며 찬탄의 시선으로 보는 아이들. 다양한 이들의 눈길이 그녀들 틈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되어 바쁘게 오간다.










100보 앞 경찰서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향화가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큰 목소리로 선창을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갑작스레 터져 나온 대한독립만세 소리에 모든 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대한독립만세!"

향화의 선창을 받아 이어지는 32명의 여인들의 고운 목소리가 더 크게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그녀들의 행진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시위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 총격과 수색과 고문을 자행한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던지라, 자신들 앞에서 이 여린 여인들이 르짖는 통곡 같은 외침이 믿기지 않았다.


곧 있어 수원경찰서 정문이 열리고 무장한 순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매일 술에 취해 찾아와 업혀가던 미쓰라 우로가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단추도 채우지 못한 속곳 차림으로 달려 나와 그녀들 앞에 섰다.

"미쳤느냐. 여기가 어디라고 이 미천한 것들이 서서 소란이냐. 다 싹 꺼지지 못해!"

"당신들이 미천하다 부르는 우리들. 이곳에서 발을 딛고 선 이 땅의 진짜 주인인 우리가!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여기 서 있는 것이 어찌 미친 일인지 말씀해 보시오. 그것이 무엇이 잘못된 일이오?"


당당하게 그에게 되묻는 향화의 기세에 말문이 막힌 미쓰라 우로는 그녀를 향해 삿대질만 연거푸 해대며 얼굴을 붉히다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한 년도 빠짐없이 다 잡아들여! 미친 것들에겐 매가 약이야. 네 년이 저리 끌려 들어가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어디 두고 보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군홧발로 그녀들에게 달려든 순사들. 무참히 가격 당하는 여인들을 보고 있던 백성들이 못 본 척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자신들이 용기 내서 말할 수 없었던 외침을 한 그녀들이 이렇게 짓밟히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이들이 순사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핏방울처럼 우련 붉게 맺힌 진달래의 꽃망울이 서러울 만큼 온 산하에 자리한 봄날. 그렇게 꽃 한 송이, 한송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저승꽃으로 다시 피었을 그녀. 한 생 묵직한 소리 내며 내려앉는 선홍빛 동백이 그녀를 닮았을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던 꽃, 향화. 그리고 32송이의 또 다른 꽃들이 피어날 봄날을 그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냐, 불러도 대답도 없고. 왜, 여기 유진 초이 좀 만나고 싶어서?"


"여기 있으니까 잊어버린 이름들이 떠오른다. 계속."


"괜히 이름 부르다 저기 담장 옆 어둔데서 손짓하는 애들 따라가지 말고 정신 단디 차려. 언니 넌 꼭 한 번씩 이렇게 멍해지더라."

영화 미스터 선샤인 촬영장 세트, 글로리 여관에 만들어진 카페로 커피를 사러 갔던 동생이 나오며 멍해있던 내게 라테를 건넨다. 빛바랜 세트장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강렬해 감고 있던 눈을 뜬다. 꿈처럼 감은 눈 뒤로 스쳐가는 이름들. 그녀들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無名이 되어버린 꽃들을 불러본다.













#선샤인랜드

#김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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