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오면 소꼬리찜과 와인을 먹어야 한대. 친치야 도블레 도세. 2016년 프랑스 선정 와인 대상 받은 거라더라?"
우아하게 메뉴판을 펼쳐들며 말하는 동생에게서 어젯밤 쓰디쓴 메뉴선택 실패의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타파스 요리와 맥주를 주문하는데, 스페인 전통 요리라는 추천메뉴를 시켰다가 고수를 물에 푹 삶아 끓여낸 것만 같은 풀죽을 한입 떠먹고 우리는 십자군 전쟁의 패인을 찾았다고 소리 질렀다.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맛에 먹다 만 빵조각 두 개를 십자형으로 찔러 넣고 식탁 끝으로 밀어놓는 우릴 보며 가게 주인이 짓궂게 웃는다. 알고 권한 거라면 내 그대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털도 곧 소멸하게 주문을 외우겠노라 다짐했다.
오늘은 그런 밤은 잊고 투박하고 동그란 접시 위 한가득 담긴 갈비찜과 만난다. 한국 음식이 그리워지던 때인지라 와인과 소꼬리에 빠져들어 미식의 나라를 예찬한다.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와인병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마시고 싶을 만큼 풍미 가득한 와인향에 빠져들며 기분 좋은 식사를 한다. 버스를 타고 달려왔기에 멀미도 달래고 숨도 고를 겸 도심 한가운데 투우장을 가는 걸로 론다의 첫 탐험지를 낙점했다.
론다에는 투우로 유명한 로메로 가문과 오도네스 가문이 있다. 둘 다 전설적인 투우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집안들이다. 로메로 가문의 뻬드로 로메로는 5000여 마리의 소를 투우장에서 떠나보냈지만 단 한 번도 부상을 입지 않은 걸로 이름난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투우사이다. 그리고 오도네스 가문의 안토니오 오도네스는 고야풍의 투우란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한 투우사로 1954년 고야시대의 복장을 하고 투우장에 나와 관중을 압도하는 퍼포먼스를 펼쳐 이름을 얻은 이다. 이 두 가문의 역사가 담긴 투우 박물관과 경기장을 걷는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열광하는 국민 민속경기이기에 어떤 식으로 소들을 기르고 관리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투우가 생겨난 유래도 궁금했기에 방문했는데, 좁고 높은 담 사이 작은 길로 우리 밖에서 투우장을 향해 난 한 길을 따라 달려야만 하는 소들의 마지막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속이 뭉근하게 뭉쳐오기 시작한다. 소가 갇혀있던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안을 보는 것도 해보라며 자랑스레 권유하는 직원분의 말을 따라 방 안에까지 들어갔다 기어이 난 점심에 맛있다고 먹었던 것들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작은 방 벽 가득히 소의 뿔이 닿는 위치에는 크고 작은 움푹 파인 공간들이 즐비했다. 안에 갇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열망을 담아 부딪혀 온 생의 흔적들이 달의 크레이터들처럼 깊게 파여 삭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소들이 이곳에서 죽음으로 난 길을 향해 달려 나갔으며,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까?
지나친 감상이란 생각이란 것도 안다. 투우란 장르가 마을축제에서 파생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같이 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겨울을 준비하고 협동을 다지던 축제에 꼭 필요했던 부분임을 생각하면 이들의 풍습을 비난하거나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자유를 갈망하며 온몸으로 벽에 부딪히며 저항했을 생명들의 흔적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가라앉지 않는 속 덕분에 경기장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엄청난 스피드로 스킵하고 시원한 바람을 찾아 누에보 다리 전망대로 올라갔다.
740미터 높이의 두 개의 절벽 마을을 연결하는 "누에보"다리는 스페인어로 새로운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름과는 달리 지금의 다리는 1793년 2번째로 지어진 다리인데 처음 1735년 착공해서 35미터쯤 지어졌을 때 다리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났고 그때 5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20여 년이 지나서야 공사가 재개되었고 그렇게 완공된 다리가 바로 지금의 누에보 다리이다. 위풍당당한 모습이 팔짱을 끼고 선 북유럽 신화 속 수문장 같다. 화강암으로 된 석벽 위로 드문드문 이끼를 머금고 자리한 다리를 보고 있으니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이 전해주는 온기가 고스란히 내게 전해진다. 햇살을 받아 달궈졌을 돌 위에 볼을 얹고 눈을 감는다. 올리브 나무를 키워낸 건조하고 따뜻한 바람이 감은 눈 위에 머무르며 햇빛을 퍼뜨린다. 계속 따라붙던 소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이 도시를 찾은 수많은 이들의 다양한 언어들과 저마다의 어조들이 음률도 다가온다.
다리를 지은 알데우엘라 건축가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더 아름다운 다리를 지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큰 일을 끝낸 뒤의 허망함으로 인해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세간의 사람들이 말하듯 다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려다가 떨어져 버린 건지 이유에 대해 아직도 여러 가지 설들이 존재하지만 자신의 건축 인생에서 다시없을 역작을 탄생시키고 난 뒤의 자부심만큼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다리 한편 창살이 드리운 곳에서 내려다보는 석벽 위 작은 집들이 즐비한 세떼닐 마을을 바라본다. 저 멀리 13세기 이슬람의 나스르 왕조가 남긴 세떼닐 성도 보인다. 문화와 문화가 충돌하고, 승리한 이들에 의해 밀려가도 이렇게 흔적은 남는다. 사람들의 언어와 풍습, 의식주에 깊게 남은 흔적들이 새롭게 변형되어 전승되어 가는 동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다리가 참 놀랍다. 더군다나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라는 헤밍웨이의 소설 배경이 되는 론다이기에 포화 속에서도 온전하게 지켜낸 문명의 흔적들을 눈에 담으며 기록한다. 이곳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노력에도 조용한 박수를 보내본다.
콘셉트이지만 어쩐지 저 위쪽 누군가와 남몰래 통신 중인 새로운 무빙 공작원 같은 동생의 모습에 사진 찍고 한참을 웃다가, 작은 토피어리 화분같이 앙증맞은 올리브나우와 붉은 부겐벨리아 꽃들이 놓인 집들의 초인종 대신 사용하는 손잡이들을 만져보다, 길냥이들과 친해져 오종종 모여 앉아 광합성을 하며 우리는 이곳에 순식간에 동화되었다. 별 기대 없이 그저 거쳐가는 경유지로 생각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볼 것도, 생각할 것도 많은 도시의 매력에 빠져든다. 시간이 되었다면 세떼닐 마을로 내려가 석벽을 그대로 살리며 지은 독특한 건축양식들을 보고 싶었는데 버스 시간표 때문에 그만 작별을 해야만 했다. 그라나다로 넘어가는 버스를 놓치면 우리는 노숙을 해야 한다. 아직 거기까지 용기를 낼 자신이 없기에 눈부신 햇살을 머리에 이고 투명하게 빛나는 론다의 풍경에 작별인사를 건넨다. 어떤 자연재해나 인재도 이곳을 틈타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속이 비어서인지, 감정적 변화로 인해서인지 피로감에 살포시 잠이 든다. 덜컹대는 버스의 움직임에 놀라 눈을 뜨니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잠든 동생이 보인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니 어린 날이 떠오른다. 옆집 아주머니께서 우리 집에 잠깐 마실 오셨다가 잠이 든 동생을 내려다보며 어쩜 이렇게 얼굴도 뽀얗고 천사 같냐며, 긴 속눈썹을 쓰다듬으시며 감탄을 하셨더랬다. 그즈음 나는 매일 같이 동네 아이들과 산으로 바다로 몰려다니며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는 보령의 모글리를 꿈꾸던 차였기에 피부도 까맣고 얼굴에 심지어 시골 아이들이라면 한 번씩 달고 다니는 흰 버짐까지 피어있었다.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내가 빤히 바라보자 덧붙이시던 한 말씀.
"언니보다 얘가 인물이 훨씬 낫겠어! 복덩이네, 아주."
마트로시카 인형처럼 동그랗고 큰 눈에 뽀얀 볼에, 심지어 핑크빛 윤기까지 나는 동생의 모습은 정말로 천사 같았다. 아름다움을 지키는 수호대처럼 나는 그런 동생을 늘 아끼고 보호하는 착한 언니로 살려고 했건만 아주머니의 그 한마디가 내 마음에 불씨를 지폈다. 그 먼 옛날 카인과 아벨의 성경 속 이야기가 왜 등장했는지 아줌마는 아셨을까? 인간의 질투심. 그것이 생각보다 아주 독하고 질긴 것임을 모르신 것이 틀림없다. 아줌마께 김치를 건네기 위해 엄마까지 방을 비우고 부엌으로 나가시자 나는 동생의 머리맡에 가 앉았다.
천사의 어디를 훔쳐와야 다시는 나보다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나는 엄마의 화장대 서랍을 뒤져 작은 가위를 하나 찾아냈다. 앞머리를 자를까, 눈썹을 밀어버릴까 바라보던 나는 상사화 꽃술처럼 탐스럽게 휘어지던 속눈썹, 그 풍성한 결을 싹둑 잘라냈다. 대칭으로 자르면 가지런한 그 모습도 예쁠까 봐 염려가 되어 한쪽만 아주 바짝. 도화지에 직접 공주를 그리고, 여러 가지 옷을 그리는 종이인형 만들기 달인도 넘보던 때인지라 나의 가위질은 신속 정확 예리 경쾌했다. 그 뒤의 일은 상상에 맡긴다. 한 달간 계속해서 동생의 책가방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다니며 늦은 밤 화장실 앞을 지키고 서 있어야 했으며 대신 숙제도 여러 번 도와야 했던 질투심의 대가는 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는 정도만 밝혀둔다.
지금은 다시 자라나 전보다 더 풍성한 결로 포들대는 동생의 속눈썹이 보인다. 내 조카들의 인물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다시금 확인한다. 다행이란 안도의 한숨은 제부에게 미안하니 가만히 삼킬 즈음 터미널로 버스가 진입한다. 드디어 도착했다. 석류의 도시 그라나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