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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니콜라스 전망대와 골목길

by Bono





버스에서 내려 어둠이 몰고 올 점령군에게 시야를 뺏기기 전 그라나다의 니콜라스 전망대로 향하는 택시를 탔다. 스페인어 발음이 미숙한 관계로 전망대 사진을 미리 캡처해 보여드렸더니 나이 든 기사분은 염려하지 말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신다. 마초적이고 그래서 더 든든해 보이시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피하시며 곡예 운전하듯 가시더니 다 왔다며 손가락으로 전방의 한 곳을 가리킨다.











전망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다. 동생과 나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골목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금방 숨이 차오르고 높은 경사로에 당황했지만, 흰 벽에 부딪힌 햇살이 반짝이며 눈앞에 일렁이는 결들이 작은 나비 떼들 같아 그 모습에 홀린 듯 걷게 된다. 어디선가 조리 중인 음식의 희미한 냄새, 아이들의 웃음소리, 싸우는 듯 높아진 목소리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틈도 없이 대치 중인듯한 남녀의 목소리까지.



골목에서 울리는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언어만 다르지 우리네의 그것과 꼭 같아 기시감이 느껴진다. 나 역시 저기 어디쯤 회칠을 한 벽 너머 작은 집에서 콩꼬투리 안 콩알처럼 동글동글한 눈매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의 귀가 시간을 길게 드리워지는 태양의 그림자로 확인해 가며 하루를 분주히 일궈가는 여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정상 위의 정상에 도착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전망대 아래 마을로 이어지는 좁을 골목들이 뿌리털처럼 뻗어나가고 있고 그 사이를 메우며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시간을 감는 물레가 천천히 감아지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크고 둥근 막이 저곳을 감싸고 있는 기분이랄까? 스노볼을 앞에 둔 크리스마스날의 소녀들처럼 괜히 들뜨고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다 문득 생각의 끝이 닿는 이름.


"엄마의 꿈은 뭐였을까? 우리만 할 때?"


"외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맨날 고고장에 롤라장 다니면서 가수 되려고 했었다던데?"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음식점 사장님이 되셨지만 우리 어릴 적 엄마는 조개젓 장사들이 나누어주는 조개자루를 하루에 5자루씩 받아다 억척스럽게 그걸 다 까고 또 까던 모습만 기억이 난다. 그때도 물론 옆에 둔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마치 소금기둥처럼 그 자리에 오래 앉아 굳어가던 엄마가 나팔바지에 반짝이는 스팽글 재킷을 걸치고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아 웃고만 것이다.


"그럼 아빠는? 알아, 언니?"


"아빠 꿈은 사막을 횡단하는 거랬어. 그것도 오프로드 지프차를 타고."


정말 오랜만에 동생에게서 아빠란 단어를 듣는다. 우리에게 볼트모드급 사용금지 단어 중 하나인 아빠.













사용하지 않으면 존재도 희미해질 법도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존재는 되려 더 기억 속에 또렷해지며 부풀어 오른다.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자라나 나의 기억 한쪽에 촉수를 뻗어 자신을 연결해 녹아든다. 그립다가 밉다가 보고 싶었다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감정의 롤러코스터까지 거치고 나면 어느 순간이 되면 어떤 외부적 요인에도 쉽게 요동하지 않는 마음속 유리병 하나가 만들어진다.



어떤 날의 향기도, 소리도, 목소리도 모두 녹아들어 굳어버린 유리병. 가만히 마음 한구석에 놓여있던 것이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은 무게의 언어로 소환이 된다.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는 있는지도 모르고 잊고 살아가게 되는 이름들 존재감을 갖게 되는 순간은 늘 위태롭다.



"우리는 어떻게 커왔을까? 너하고 내가 자란 시간들이 생각나지 않아. 엄청난 속도로 돌려감 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흐릿하게 뭉개져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기분이야."


"언니 넌 늘 바빴어. 나가 노느라. 나는 얌전히 집을 지키며 곪아갔지. 안으로."


그 말을 들으니 살짝 억울했다. 학교 끝나면 식당 일 하는 엄마를 돕느라 늘 교복 앞자락이 젖어있던 나에게 동생이 이렇게 말하다니. 하지만 기억은 같은 시간대를 공유해도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달리 기록될 수밖에 없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곪아 부은 게 아직도 안 나은거지?"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동생의 볼을 찔러본다. 폭신하게 달라붙는 호빵 같은 감촉이란. 이래서 내가 푸바오와 아이바오를 격하게 애정한다. 흑임자 인절미 같은 움직임이 내 동생과 조카를 꼭 닮았단 말이지.


"단매에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손 떼라."










적어도 지구 멸망 3초 전까지는 온전하게 살고 싶은 난 동생의 명을 받들어 얌전히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좁은 골목길을 신나게 걸어본다. 타일조각이 멋스러운 집부터 의자가 닳아진 오토바이가 놓인 작은집 대문을 지나, 바커스의 은총을 과하게 받은 스페인 신사분의 끈질긴 구애를 피하며 골목을 걷는다.



애써 덮으려고 하지 않는다. 커오는 동안 생긴 흉터 위로 자연스레 새 살이 돋게 환부를 꺼내 바람에 말린다. 서로의 목표를 놓고 그걸 위해 살아오느라 화해하지 못했던 어린 날들이 갇혀있는 마음의 방, 그 문을 열어 거풍을 한다. 바람이 훑고 간 자리에 일렁이는 유리병 하나, 가만히 뚜껑을 열어 골목길 위에 굴려본다.


내 걸음보다 동생의 걸음보다 한발 더 앞서 굴러가는 모습을 본다. 우리들의 말소리를 담고 골목 끝 어딘가에서 반짝이며 흩어질 어린 날의 기억들이 더는 외롭거나 슬프지 않기를 바라며 사진을 찍는 나를 기다려주며 인상을 쓰고 있는 작은 곰에게 달려간다. 355일 늦게 지구로 온 나의 또 다른 분신, 동생과 함께 이곳을 걷는 행복. 살아내기를 참 잘했다. 너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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