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다. 오렌지 향기가 넘실대며 창문을 두드린다.어젯밤 대화 때문인지 일찍 깬 잠에 창 너머 하늘빛이 달라지는 걸 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머리까지 풀고 창문에 붙어있으니 딱이다. 사다코!"
"아침부터 똥꼬 발랄한 시비구나. 하늘 좀 봐봐. 말라가를 못 가 아쉽다만 푸른색 향연이다. 온통.
코발트블루로 깨어나 울트라 마린 블루로 깊어지더니 바이올렛 블루로 옅어지면서 페일 블루로 남은 달의 여백이 되는 이 순간이!"
"그만해. 가끔 너 그럴 때 보면 자폐 같아. 뭔 이름을 그렇게 달달달 외워 돼. 은돌이가 학명으로 숲 속 동물 친구들부터 연못 생태계 생물들까지 외우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나. 너 손톱개구리 라틴어 학명이 뭔지 알아?"
그렇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내 조카 은돌이는 한글로 대화도 잘 안되는데 특이하게도 영어, 정확히는 라틴어 학명들을 줄줄 외운다. 문제는 그걸 상대방에게 되묻는데 은돌이와 한쪽의 대화라도 하고 싶어 학명을 외우기 시도하다 낙제자가 되어버린 난 동생의 말에 순식간에 창문 옆으로 쪼그라든다. 그대 안의 블루는 김현철, 이소라 씨 노래로만 낭만 가득인 걸로 하자.
워싱턴 어빙이 말했다.
"신실한 무슬림 신자들에게 메카의 카바 시전이 그렇듯, 그라나다의 알람브라는 역사와 시를 좋아하는 여행자들에게 숭배의 대상이다."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1세가 사비카 언덕에 궁전을 짓기 시작해 15세기까지 확장이 이어지던 옛 왕조의 영광이 가득한 알람브라 궁전을 향해 버스를 탔다. 성채를 향해 올라가는 경사로를 따라 건물의 색들이 달라진다. 미리 예약해 둔 나스르 궁. 실제로 만나게 될 궁전이 궁금해 발끝이 움찔거린다. 어른이 되어 이렇게 설렜던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손꼽아 보게 된다. 정갈하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그라나다의 문과 포도주의 문을 통과해 이 성을 보호하고 외적을 경계하던 성채, 알카사바에 들어선다.
시내 전망은 물론 저 멀리 산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높이의 벨라탑이 보인다. 이 탑에 매달린 종은 매년 1월 2일에 미혼의 여성이 종을 울리면 그 해가 가기 전에 결혼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그날이 되면 여성들이 종을 치기 위해 줄을 선다고 하는데, 결혼이란 환상을 완성하는 동화적 요소가 가득한 벨라탑 이야기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통한다니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돈키호테처럼 씩씩하게 나스르 궁을 향해 전진한다. 왕의 검이 어깨에 닿은 이달고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한세대의 업적을 마주하는 순간. 이슬람 왕조가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과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고야 말았다. 겉보기에 평범했던 건물이 안으로 들어오자 정교하고 특색 있는 조각과 타일들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현재 메수아르 궁, 코마레스 궁, 사자의 궁 이 세 개만 남아 있는데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알람브라 궁전 전체(헤네랄리페와 알바이신 지구까지)가 등재되었다.
건물 벽면과 아치 윗부분의 회벽 세공에 사용된 아라베스크 무늬는 인간이 갖고 있는 탐미적 본능이 폭발하듯 펼쳐져 있다. 사람과 동물을 건물장식에 쓸 수 없다고 한 이슬람 교리에 따라 장소를 꾸밀 수 있는 벽면에는 회벽 세공을 통해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을 하고 하단부에는 독특한 문양의 채색 타일 아줄레호, 그리고 천장의 목재장식등으로 시도할 수 있는 소재의 한계를 만회하고자 했던가 보다.
채색 타일의 문양을 살펴보다 보면 나스르 왕조의 문장, 멘도사 가문의 문장,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 알라만이 승리자 다란 뜻의 캘리그래피, 헤라클레스 기둥까지 다양한 문양이 발견된다. 이 궁을 차지한 스페인 왕조가 후에 덧입혀 그렸다고 생각하는데 스페인 국기에도 있는 헤라클레스 기둥의 리본 장식이 여기 타일에서도 발견되니 신기함과 동시에 씁쓸함도 밀려온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문양 속에 담겨있는 한 세대의 기록을 훼손한 느낌도 들어서인가 보다. 스페인 카를로스 5세의 좌우명 "플루스 울트라Plus Ultra(더 멀리 나아가다)"까지 리본 위에 새겨진 이 문장을 마주하며, 저 문양에서 미국의 달러화 $ 기호가 파생된 걸 생각하니 정말 멀리까지 원대하게 나간 문화의 힘을 새삼 깨닫는다.
이슬람교도들이 매일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는 기도실을 지난다. 안으로 들어간 공간과 그 위를 장식한 정교한 문양들이 신에 대한 이들의 충심과 열망을 엿보게 만든다. 기원은 하나였을 종교들이 서로 반목하고 다투고 서로의 멸망만을 기원하고 있는 요즘의 세태를 보면 정결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기도실이 슬퍼 보인다. 이곳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이들이 바라는 평화와 사랑이 정말 있는 걸까?
기도실 창문 너머 보이는 알바이신 지구의 투명한 하늘과 정겨운 건물들은 그들의 특산물인 타라세아를 떠올리게 한다. 색깔이 다른 여러 종류의 나무를 이용한 정교한 상감기법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목공예 작품들이 알바이신의 특산물인데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 자체가 그렇게 꾸며진 예술품을 보는 것 같다.
나스르 궁전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중요한 공간으로 여겨지는 코마레스 궁으로 향한다. 드디어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완벽한 대칭의 아라야네스 중정을 만난다. 쭉 뻗어있는 직사각형의 긴 수로에는 잔잔한 일렁임으로 중정을 품고 있는 물 그림자가 보이고, 연못 주변에는 천국의 꽃나무라 불리는 키 작은 관목나무 아라야네스가 쭉 있다. 은은한 향기가 여기에서 나오는가 보다. 동생과 난 곳곳에 자리한 문양 하나하나를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아치웨이 양쪽에 새겨진 다양한 캘리그래피의 문양도 직각의 선을 강조하는 쿠파 서체와 아름다운 흘림체 나스키 서체가 혼용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으로 벽을 장식하고 있다. 특히 천장의 독특한 문양은 '무데하르 양식'이라 불리는 건축 양식으로 르네상스 양식에 이슬람 건축 양식이 혼합된 결과물로 스페인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 한다. '무데하르mudejar'가 아랍어의 무닷잔mudajjan이란 스페인어의 와전이라 하는데 기독교도의 지배를 받으면서 스페인 땅에 살았던 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기억하고 전승하며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낸 독특한 문양과 장식들을 올려다본다.
이 문양들은 한 변이 11m인 정사각형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대사의 방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마도 나스르 궁전에서 가장 호화로운 공간이 왕의 침실이나 집무실이 아닌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닥과 벽, 천장까지 모든 공간에 새겨진 예술혼에 빠져들었다. 미늘살창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직선의 빛들이 퍼져나가 방을 밝히고 그 빛이 마치 술탄에게 드리운 하늘의 영광처럼 보였을 중세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걷는다. 보호줄 안쪽 바닥에는 '알라만이 유일한 승리자다'란 나스르 왕조의 슬로건이 적힌 방패 모양도 보인다. 그걸 피해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일곱 번째 하늘을 형상화 한 조각이 보인다. 무려 8,000여 개의 삼나무 조각을 모자이크처럼 짜 맞추어 완성한 것들이라고 하는데 가만히 확대해서 보면 하늘이 별들도, 꽃들도 일제히 문양 안에서 넘실거리며 춤추는 기분이 든다. 이토록 아름다웠기에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인 보압딜이 1492년 가톨릭 국왕 부부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망명길을 떠날 때 다시는 이곳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더 슬퍼하며 눈물 지었단 일화가 전해지는 것 같다.
열두 마리 사자상이 있는 사자의 중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분명 이슬람교에서 동물이나 사람으로 장식을 하는 걸 피한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이유로 떡하니 동글동글한 사자들이 12개나 자리하고 있는지 연유가 궁금하던 차, 그라나다 유대인들의 열두 부족장이 나스르 왕조의 술탄에게 보낸 우정의 선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자의 중정을 관통하는 바닥의 네 개의 물줄기는 분수대에 있는 사자상 입에서 흐르는 물들이 모여 만들어지는데, 이를 에덴동산의 4개의 강으로 해석하는 설도 있다. 지금은 서로 갈라져 돌이킬 수 없는 반목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이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아브라함 이전의 이야기들은 공통으로 갖고 있는 두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던 옛 시대의 모습들을 사자상을 통해 떠올려 보게 된다.
아벤세라헤스의 방에 들어서면 두 자매의 방 천장과 비슷하나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별모양의 천장 형태와 그 사이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모카라베 장식에 놀라게 된다. 사각의 벽과 팔각의 꼭짓점들, 그 아래 놓인 2개의 창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내게 쏟아져 내려오는데 그 빛이 바닥에 있는 12면체의 분수 위 물빛에 닿았을 옛날엔 방 안이 온통 금빛으로 일렁였을 것 같다. 눈부신 윤슬이 반짝이는 황금의 방. 이곳에서 아벤세라헤스의 젊은이들이 몰살당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들의 한이 서린 공간은 지금은 그저 고요히 흐르는 시간을 덧입고 침묵하는 중이다.
카를로스 대제의 궁은 앞서 보았던 궁의 공간들과 너무 이질적이라 되려 치기 어린 건축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승자의 만용처럼 느껴지는 궁의 외벽 말고삐를 걸어두던 곳을 보다 그라나다 시 청사 위 청동 기마상이 떠올랐다. 조각상의 제작 의도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는데, 내가 조각상을 기억하는 이유는 조각상에 영향을 준 비얄타의 작품 '엘 인스탄테 프레키소El instante preciso',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행복은 말을 타고 공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위태롭고 또 찰나의 순간순간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다른 것에 한눈을 팔지 않기 위해 눈을 가리고 말 위에 올라 앞을 향해 달려야 한다.
눈을 가리고 말에 올라 달리고 있는 조각상. 맹목의 질주일 수 있겠지만,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었던 조각상을 카를로스 대제의 궁 벽면에 메어둔다. 떠나와 있는 중에도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잠시 멈춰 있는 일에 대한 걱정, 로밍한 요금이 걱정될 정도로 쏟아지는 문자들을 모두 삭제해 버린다. 꼭 필요했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한 시대를 풍미한 왕조도 그들의 시간이 지나면 그만이다. 위대한 업적도 뒤에 이어지는 이들의 평가에 따라 삭제되거나 보존될 뿐이다. 중요한 건 지금 나와 당신이 있는 시간을 온전히 누리며 기뻐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지금 이 순간뿐이다. 흘러가는 삶에 대한 예의를 떠올려 보며 알람브라를 떠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