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괴도키드가 아니다. 예고장을 보내고 찾아오지 않는다.
낭만은 괴도키드가 아니다. 예고장을 보내고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연히 만난 낭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낭만이 가득한 포르투의 저녁도,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
클레리구스 라이트쇼의 여운을 안고 식당으로 향했다. 우중충한 날씨에는 뜨끈한 국물이 어울리기 마련이니까. 저녁 메뉴는 쉽게 정했다. 한국인들 입맛에 찰떡이라는 해물밥과 구운 문어 요리. 불확실한 날씨 속에서 확실하게 보장된 맛을 즐기고 싶었다. 해물밥이라고 불리는 이 메뉴는 맛이 정직하다. 꽃게, 조개, 새우가 들어가 마치 바다를 통째로 졸여낸 맛이라 뜨끈한 국물에 밥 한 숟갈이 간절해질 때 먹기 좋다. 포르투갈에서 문어요리는 실패할 가능성이 적은 메뉴 중 하나다. 짭조름한 문어 구이는 입에서 살살 녹아 금세 사라진다. 확실하게 맛있는 요리를 한 입, 두 입 먹을 때마다 우중충해진 날씨에 살짝 가라앉은 몸과 마음이 기분 좋게 풀렸다.
입맛에 꼭 맞는 식사를 즐기는 와중에, 쏴아아-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기어코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던 터라 꼼짝없이 식당에 갇히고 말았다. 길 한복판에서 비가 오는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이제는 흐린 날씨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조금은 담담해진 표정으로 하늘이 비를 시원하게 뿌리고 싶었구나, 생각하며 디저트를 주문했다. 크렘 브륄레와 에스프레소. 익숙한 이름의 디저트를 골랐다. 사실, 디저트는 그리 인상적인 맛은 아니었다. 방금 먹은 해물밥과 문어 요리에 비하면 오히려 아쉬운 축에 속했다.
내가 아는 크렘브륄레는 조금 더 설탕이 넓게 고루 퍼져서 톡톡 깨먹는 재미가 있는 디저트인데, 설탕이 살짝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갑자기 생긴 디저트 타임이라 이 순간을 누리기로 했다. 식사 후에 디저트를 권하는 문화가 익숙지 않아 늘 계산서를 요청하고 식당을 떠나는 우리였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달달한 디저트와 쌉쌀한 커피 한 잔을 문 너머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뱃속에 차곡차곡 저장했다.
예고 없이 쏟아진 비는 생각보다 금방 그쳤다. 거짓말처럼 디저트를 다 먹어갈 때 빗소리가 멎고, 우산을 접고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하늘이 흐려서 아쉬운 마음을 디저트로 대신 달래기를 바랐던 걸까 싶을 만큼, 완벽한 타이밍에 비가 그쳤다. 마치 길을 걷다 우연히 네 잎 클로버를 주운 아이가 된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식당을 나섰다.
한차례 비가 시원하게 쏟아진 포르투에 상쾌한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빗물을 잔뜩 머금어 촉촉해진 돌바닥을 찰박찰박 밟으며 히베이라 광장으로 향했다. 하늘이 맑았다면 한창 예쁜 노을이 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비가 신나게 바닥을 적시고 간만큼 하늘은 누가 회색 물감을 한 통 부어놓은 듯 흐렸다. 이런 날씨라면 노을은 당연히 안 보이겠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비가 그친 걸로도 충분했고, 곧 어둠이 찾아오면 도루강의 야경을 누릴 수 있으니까.
사실 흐린 날일수록 저녁을 애타게 기다린다. 밤은 낮의 날씨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구름이 많은 날에는 별과 달은 숨어버리곤 하지만, 어둠이 내리면 도시는 오직 노란 조명과 제 고유의 색깔로만 채워진다. 포르투의 노을만큼 도루강의 야경을 좋아하기에, 저녁 식사 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도루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둥, 탁. 착, 착!”
어스름이 내려앉기 전, 한층 어두워진 하늘 아래 공기처럼 시원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를 따라간 곳에는 남자 두 명이 도루강을 무대 삼아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목을 긁어내듯 시원하게 내지르는 중저음의 보컬, 나무 상자처럼 생긴 악기 카혼에 손이 닿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묵직한 울림. 그동안 버스킹을 여러 번 봤지만, 이런 공연은 처음이었다. 회색빛으로 가라앉은 도시를 집어삼킬 듯한 무대 장악력의 소유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날씨 따위는 무슨 상관이냐는 듯, 거칠고 열정적인 무대를 펼치고 있었다. 가슴을 둥둥 두드리는 카혼 소리와 시원한 노랫소리에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에게 텔레파시를 받은 것처럼,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자마자 찬이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찬아! 저기 봐!”
노을 사냥꾼의 본능이 발동한 걸까. 잿빛 구름으로 가득하던 하늘 끝부분이 분홍빛이었다. 버스킹 연주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금방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저 노을을 먼저 두 눈에 붙잡아야만 했다. 자칭 노을사냥꾼인 나는 찬의 손을 잡고 냅다 달렸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했다. 모루 공원까지는 못 가더라도, 노을이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는 곳에서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동 루이스 1세 다리 아래를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여유로운 이 도시에서 우리가 숨이 차도록 달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더는 뛸 수 없을 때쯤 멈췄다.
모루 공원에 한참 못 미치는 높이였지만,
포르투의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이 우리의 명당이었다.
거친 숨을 고르는 사이 하늘은 어느새 짙은 주홍빛으로 변해 있었다.
뒤를 돌아보길 참 잘했다. 우연히 만난 분홍색 솜사탕빛 노을이 붉어갈수록 우리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노을 때문인지, 신나게 뜀박질을 해서 그런 건지, 마음이 들떠서 그런 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을을 볼 거라고 기대조차 하기 어렵던 흐린 하늘을 비집고 타오르는 붉은빛에 우리는 그저 감탄만 내뱉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주홍빛 노을은 금방 모습을 감추고 밤하늘을 데려왔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붉게 타오르던 노을의 잔상이 한참을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으니까. 찰나였지만, 포르투에서 본 하늘 중 제일 환상적이었다.
다시 돌아온 히베이라 광장에서는 아까 그 밴드가 여전히 열정적인 공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버스킹 대신 노을을 선택한 건 나지만, 그 사이에 버스킹도 끝났다면 아쉬웠을 텐데 눈과 귀가 즐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내가 사랑하는 도루강의 야경을 배경으로, 그들의 음악이 덧입혀졌다. 물기를 머금어 한결 차분해진 풍경에 이보다 더 완벽한 배경음악은 없을 것 같았다.
아. 나는 오늘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사랑하겠구나.
우연히 찾아온 낭만,
흐린 하늘을 비집고 붉은 얼굴을 보여준 노을,
마음에 쏙 드는 음악을 들려준 밴드,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함께해 준 찬.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밤을 선물해 준 이들에게 고마운 밤이었다.
사랑의 순간으로 가득했던 포르투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
매주 금요일에 반갑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