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환경에서 적응하는 일
‘이상하다. 공항 근처 숙소로 가는 인도가 분명 있을 텐데.’
밤 열한 시 삼십 분, 포르투 공항에 도착하는 일정. 밤에 혼자 유심도 없이 이동하기 어려울 것 같아 공항 근처 숙소를 예약하고 온 여행이었다. 공항부터 숙소까지는 10분 거리. 이 짧은 거리를 헤매는 건 계획에 없었다. 의지할 건 구글맵 하나였는데, 안내받은 길에는 인도가 보이지 않았다. 차가 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무작정 앞만 보고 움직였다. 눈앞에 보이는 길이라고는 차도뿐이었다. 난간을 넘고, 차도를 가로질렀다. 어둡고 사람이 적어서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은 숙소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만 생각하자.’
지퍼가 고장 난 배낭을 품에 꼭 안고, 보스턴백을 얹은 캐리어를 드르륵드르륵 굴렸다. 멀게만 느껴지던 호텔 간판이 가까워지면서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숙소까지 오는 10분이 한 시간처럼 길었다.
드디어 오늘의 숙소 파크호텔 포르투에 도착했다. 체크인이 어렵지는 않아야 할 텐데. 두 눈을 질끈 감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호텔리어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여권을 건네니 종이 한 장을 넘겨받았다. 읽어보고 시그니처를 적으라는데, 그게 뭔가 싶어 잠시 머뭇거렸다. 시그니처는 사인이었다. 호텔리어가 손으로 사인을 그리는 제스처를 보여주자 그제야 이해했다. 알파벳을 뗀 지 10년 차인데, 이런 걸 이제야 알다니. 새삼 내가 알던 세상이 좁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모든 순간이 새로웠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공항에서부터 골칫덩이였던 배낭부터 툭 내려놓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라기에는 조금 더 시원한 기분이었다. 자유로움, 홀가분함, 후련함. 여러 단어를 떠올리다 보니 뚜렷해졌다.
해방감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밖에서 혼자 잠을 자는 것도 처음이었다. 앞으로 며칠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낯선 도시에서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닐 수 있다니. 죄를 짓거나 억눌린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닌데, 자유를 누릴 생각에 기대가 부풀었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개운했다. 약 스무 시간의 비행을 하며 쌓인 피로가 샤워 한 번에 모두 씻겨 내려갔다. 몸에는 충분히 물을 묻혔으니, 이제 마실 물이 필요했다. 기본으로 제공되는 물이 없어 로비에 있는 자판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5유로를 넣자, 50센트짜리 동전 네 개가 짤랑거리며 떨어졌다. 3유로짜리 물이었다. 생각보다 비싼 값에 놀라기 전에, 유럽의 화폐 단위에 익숙해져야 했다. 평생 한화만 사용한 내가 유로를 쓰는 날이 오다니. 생소한 화폐 단위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려면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바쁘게 굴린 머리에 휴식이 필요했다. 새하얀 침구가 깔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적당히 단단한 침대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제 7시간 정도는 충분히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방 안은 고요했다. 밀려오는 피로에 눈을 감았다. 이불속이 따뜻해 몸도 마음도 노곤해졌다.
눈앞이 어두워지자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낯선 도시의 일상에 들어가는 일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숙소로 찾아가는 길도 순탄하지 않았고, 익숙하지 않은 화폐로 물 한 병 사는 것조차 서툴렀다. 모든 순간이 어설펐지만, 생경한 감각이 싫지 않았다. 엄마 손을 놓고 처음 등교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천 원, 오천 원, 만 원. 학습용 돈을 손에 쥐고 은행 놀이를 하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처음 만난 도시에서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일들에 다시 익숙해지면 나는 또 어른이 되겠지.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 적응하는 일과 내가 선택한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사뭇 달랐다. 두려움보다 설렘이 컸다. 지금은 서툴지만 금방 자연스러워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포르투에서 마주하는 처음들을 잘 이겨낸다면, 앞으로 살아가며 맞이할 수많은 처음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일도 새로운 것들이 가득한 하루를 보내겠지.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살짝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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