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신 Nov 05. 2023

공주와 왕자

내가 불편해하던 사람의 모습은 내 구린 면이었다.



 한동안 나의 정체성은 공주였다. 공포의 주둥아리를 줄인 공주.


 내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자조 섞인 농담을 자주 했다. 남을 헤치지 않는 개그는 자조적 개그인데 나는 웃기지도 않고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말의 힘은 강했다. 나를 자주 비아냥거리다 보니 나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마음이 모가 나 있으니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역시 날카로웠다. 나는 감지했다. ‘아, 말을 함부로 했다간 내 입은 더 이상 입이 아닌 주둥아리가 되겠구나.’


 그래서 말을 최대한 아끼다 한 번에 후회의 말들을 터뜨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공주병을 멈추게 한 왕자를 만났다.


 한 독서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다양한 성격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져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 비판적 사고를 잘하는 사람,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 마지막으로 불편한 사람.

 

 참여자 중 한 사람이 불편했다. 그 사람은 왕자. 왕자는 호불호가 확실하고 복잡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에 대한 감상도 간단하다. “저는 별로였어요.”

 별로인 이유는 자기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내가 발견하지 못한 해석이나 통찰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왕자는 자신과 어떻게 생각이 다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건 듣는 사람이 알아서 해석해야 하는 영역이었다.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장면이나 문장을 발췌해서 “나는 이게 별로고 별로고 별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왕자는 이야기의 맥락은 무시하고 한 문장에만 꽂혀 자기 삶과 생각을 거침없이 말한다. 이건 소신 발언이기보다 그냥 어떤 생각도 거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기에 종종 헉하게 했다. 다른 참여자가 잘못 이해한 부분을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반대 의견을 말하면 그는 건성으로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동의 못 해요.”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모임이 끝나고 나면 마음이 넉넉해지기보다 불편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왕자와 다르게 평소에는 머릿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하지 않으려고 힘주며 산다. 머리에 힘주랴 싫은 것을 받아들이랴. 이 부정적인 에너지가 차곡차곡 쌓여 이상하게 발현된다. 처음에 싫었던 건 한 가지인데 이게 제때 해소되지 못하니 이 하나가 전체가 돼버린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방출하지 못하도록 끌어안고 있다 누군가 심기를 건드는 순간, 굳어 있던 케첩이 ‘푹 ’ 소리를 내며 사방팔방으로 튀는 것처럼 내 분노도 푹하고 튀어나왔다.


  왕자를 꾸준하게 미워했던 이유는 그 모습이 내 모습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미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은 금세 수치심으로 변했다. 그리고 자기 검열을 심하게 하는 나와 다르게 솔직하게 표현하는 왕자가 얄미우면서 부러웠다. 왕자는 좋고 싫음이 확실해 뒤끝이 없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말을 세게 하지만 여행 다녀온 후 선물을 주거나 간식을 챙겨 온다. 책에 대한 감상이 긍정적이기보다 별로라고 말하지만 모임이 끝나고 나면 늘 책 추천을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 모임 때 추천받은 책 재밌었다고 시원하게 말하는 그.


 그는 싫어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하고 나는 싫어하는 것을 장황하게 말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나는 싫어하는 것을 말하거나 반대 의견을 말할 때 쿠션어를 엄청 쓰며 말했다. 최대한 나는 무해한 사람이에요. 무해하다는 것도 내 기준이지 누군가에게는 유해할 수 있다.


 나와 타인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기본적인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충분한 탄수화물 섭취, 수면, 휴식. 나는 충분한 탄수화물 섭취도 휴식도 갖추지 못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무한대로 나오는 게 아닌데, 한정적인 에너지를 나를 비하하고 미움받지 않기 위해 애쓰다 보니 정작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불만은 쌓여가고 에너지는 고갈되는 상태가 되었다. 계속 회피하기만 했던 내 모습을 직면하게 한 왕자.


 감추고 싶은 모습을 직면할 때면 몽둥이로 맞는 기분이다. 얼얼함이 수그러들고 나니 ‘나 사실 이런 구린 모습도 있었다!’라고 글로 고백하게 된다. 내 공주 정체성은 하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내 구린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면 구림의 강도가  낮아진다. 어쨌든 요즘 공주 정체성은 잠잠해졌다.


작가의 이전글 내 기억은 믿지 못해도 기록은 믿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