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소 유작전 <탈속의 코미디> 2006 (로댕갤러리)
대학에 가서 처음 본 전시는 로댕갤러리(지금의 플라토미술관)에서 했던 박이소 유작전(遺作展)이었다. 전시에 대한 감각도, 관심도 없었던 나는 '박이소'가 작가 이름이고 '유작전'이 작고한 사람이 생전에 남긴 작품을 모아 만든 전시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깨달았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거다.)
대신 고등학교 3년을 내내 입시미술을 했었는데, 수능을 망치고(늘 그렇듯) 원하는 대학에 떨어진 후 재수를 고민하다가 뭘 배우는 학과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로 다른 대학의 다른 전공으로 입학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나는 대학 생활 자체를 적응하기 힘들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I 인간인 내 성향은 차치하더라도, 생긴지 10년이 안 된 학과라는 수식어와 낯선 전공 이름, 저마다 너무 다른 성향의 학생들의 분위기는 서로 부딪혀 어그러진 이질감을 주었다. 함께 입학했던 동기 중 몇이 한 학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거나 전과를 준비했다. 나는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겉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던 까닭은 아직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도, 동기들도, 학교도.
우리는 종종 수업 시간의 일부를 할애해 전시를 관람했다. 서울에 올라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는 을지로도, 갤러리로 모두 크고 낯설었다. 더군다나 박이소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흔히 전시회라고 하면 생각하는 평면회화나 조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더욱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작품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명제표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괜히 리플렛만 뒤적였다. 낯 가리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오래전 일이라 거의 다 잊었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작품들도 있다. <honesty(정직성)>의 가삿말을 번역해서 직접 작가가 불렀던 노래가 전시실 한 켠에서 흘러나왔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기 전 남겼던 <우리는 행복해요> 드로잉.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아, 그러니까, 이게 미술이라고?
전시실에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작품들이 있었다. 장르도 다양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그 전시를 보게 된 것이 아주 아쉽다. 그때의 내가 너무 모르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내 생애 첫 전시가 박이소 유작전이었다는 것은 아주 큰 행운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모호해 내가 앞으로 배울 것에 대해 혼란스러웠던 기분이 마지막 작품 앞에 서자 말끔하게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출구와 가까운 쪽에 설치되어 있었던 건 낡은 조명들이었다. 고깔 모양의 갓이 넓고 키가 제각각이었다. 빛이 아주 밝았고 내가 그 옆을 지나는 동안 희고 따뜻한 빛이 나를 쪼았다. 이게 작품인지, 아니면 다른 작품들을 비추기 위한 조명인지 헷갈렸던 순간 나는 그것의 제목을 발견했다.
당신의 밝은 미래. 과장 조금 보태서 나는 저 조명이, 막막했던 나의 앞길을 비춰주는 것 같다고 느꼈다. 눈이 부신 빛 사이를 통과한다는 건 굉장히 생경한 경험이었는데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아주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뭣도 모르는 스무살, 그때에 나는 어렴풋이 '아, 이런 게 작품이고 또 예술의 역할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도 관람객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전시를 사랑하며, 그런 전시를 기획하려 애쓴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 <당신의 밝은 미래> 작품을 찾아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나에게 아주 다정하고 따뜻했던 작품이 한편으로는 냉소적이고 또 헛헛한 감성을 담고 있다는 것인데, 나는 정말 많이 놀랐다. 허술해보이는 조명이 흰 벽을 비추고. 그래서 그 빛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막혀 답답하게 머물러있기 때문에 자포자기적인 희망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앞서 내가 느꼈던 감정이 틀린 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중적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 관람객이 무얼 느끼든 모두 다 맞다. 내가 작품을 봤던 십오년 전, 조명이 벽이 아닌 관람객 쪽으로 향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내 기억이 틀린 걸수도 있고, 잠시 작품의 설치 방향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전시를 기획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처음은 늘 여기이다. 박이소. 당신의 밝은 미래. 그것이 문장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스무살의 내가 이 작품을 통해 받았던 벅찼던 감정을 떠올릴 때면 이미 하늘의 빛이 되어버린 박이소 작가에게 당신의 작품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고 전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