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공간 다른 생각 #2
세상이 이렇게 빨리 바뀌어도 되나 싶을 때가 있다. 작년에 샀던 옷이 한 해 만에 유행이 지나 입기 민망해졌을 때, 할부금도 다 갚지 못한 스마트폰이 어느새 구닥다리가 되어버렸을 때, 개업 축하 화환이 채 시들기도 전에 임대 문의 딱지가 붙어버린 가게를 볼 때 그렇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해가 갈수록 잦아진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가 내가 바뀌는 속도를 기어이 넘어선 모양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남아 있는 것들은 있다. 어떤 것들은 세상과 함께 바뀌어서, 어떤 것들은 바뀌지 않아서 살아 남았다. 그러니 살아 남기 위해 어떠해야 한다는 어떤 말도 정답이 아닐 것이다. 유행을 타지 않는 옷을 사는 것도, 최신식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로 가게를 꾸미는 것도 정답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피곤할 정도로 자주 바뀌는 세상 속에서 좀 더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바뀌지 않아서 살아 남은 쪽인 것 같다. 하루하루 낡아가는 것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다른 낡아가는 것이고, 그 중에 제일은 낡았음에도 여전한 관심 속에서 남아 있는 것들이다.
학림다방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다. 가게의 이름을 제공한 서울대가 자리를 옮겼을 때도,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학림사건이 터졌을 때도, 외환 위기가 닥쳤을 때도, 학림은 예의 그 자리에 있었다. 첨단의 도시에서 오래된 것은 소수자이며 더구나 다방이라는 이름은 거의 멸종 위기다. 그럼에도 학림은 남았다. 그냥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명소다. 찻집에 줄을 서서 겨우 입장한 것은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62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킨 학림은 세상의 속도 따위는 상관 없다는 듯이, 또 다른 한 해를 대학로에 새겨내고 있다.
학림에 대한 글들은 대부분 그 곳에 추억이 있는 사람의 것이거나 그 곳에서 추억을 만들어갈 사람의 것이다. 그곳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우리는 정작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다. 추억이 있는 사람들의 고집에서도, 추억을 만들어갈 사람들의 책임감에서도 벗어난 글도 의미를 지닐 것이라는 작은 기대로 글을 옮긴다. 비엔나 커피 4잔을 마셨으니 글 쓰는 자격으론 충분하지 싶다.
성수동에는 ‘어니언’이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카페가 들어선 건물은 70년대에 지어졌다. 오래된 갈색 벽돌을 그대로 활용했지만 그 위에 붙은 메탈 소재의 간판 덕분에 오래되었다기보다는 새롭다는 느낌을 준다. 소위 말하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다. 학림다방에 대한 글에서 웬 카페 어니언 타령이냐고? 학림다방을 방문하기 몇 시간 전 어니언에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방문한 두 공간은 옛 공간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입구에 공간에 대한 글이 적혀있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우선, 카페 어니언이 하는 말은 이랬다.
우리는 공간을 탐색하던 중, 과거의 구조 속에서 새것이 줄 수 없는 가치를 발견했다. 바닥에 묻은 페인트 자국, 덧대어진 벽돌 하나하나가 세월을 기억하는 훌륭한 소재였다. 우리는 이 모든 흔적을 살리며 과거의 공간을 다시 재생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과거의 공간이자 동시대적인 공간으로서의 재해석이 필요했다.
2층에 위치한 학림다방에 올라가기 전 마주치는 글은 이랬다.
말하자면 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어떤 것이 있노라고 묵묵히 속삭이는 저 홀로 고고한 섬 속의 왕국처럼…
옛 공간을 이어왔다는 점은 같았으나, 오래된 것을 활용하는 방식은 극과 극이었다. 투박하고 시원시원하게 떼어낸 듯한 어니언의 공간은 분명 지금 시대의 것이었고, 낡은 나무질감의 테이블과 폭이 좁은 의자가 들어 선 학림다방의 공간은 분명 몇 십 년 전의 것이었다. 오래된 것을 ‘재해석’하려고 애쓴 공간을 떠나 오래된 것을 그대로 ‘지키려’ 애쓰는 공간에 앉아 있으니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두 공간 중 어느 쪽의 철학이 더 훌륭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모두 오래된 공간을 이어가기 위한 자신만의 방식에 충실하고 있으므로. 다만, 내가 앞으로도 계속 방문하고 싶은 공간은 어니언 쪽에 가깝다. 학림다방에 앉아 있으면 이 장소는 바깥과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이 들어 이미 이 시대는 지나갔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데 반해, 어니언에 앉아 있으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있는 듯해 묘한 안정감이 든다.
현재와 단절된 지나간 과거를 경험하고 싶다면 학림다방을, 과거 슈퍼였기도 정비소였기도 했던 장소에서 다른 이야기를 가만가만 상상해보고 싶다면 어니언에 가면 된다. 풍성한 클래식 선율에 비엔나커피 한잔하고 싶다면 학림다방이고, 아보카도명란바게트에 원하는 원두를 골라 만든 아메리카노 한잔하고 싶다면 어니언이다.
학림다방에 간다면 2층 가장 구석에 있는 자리를 노려라.
다방은 전체 면적의 1/4 정도를 1층과 2층으로 분리해 놓았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곧바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생각보다 넓게 느껴지는 이유는 1층에서는 2층의 공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큐브의 세 면만 보고 보이지 않는 뒷면들을 상상해 머릿속으로 3차원을 그리듯이, 2층으로 연결되는 좁은 계단과, 2층의 낮은 좌석들, 그리고 분리되어 낮아진 천장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뒷공간 역시 좁을 것으로 상상하게 된다. 기대보다 넓은 공간을 마주하게 되니 자연스레 그 공간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층에서도 복도의 끝, 가장 구석에 있는 자리가 바로 상석이다. 다방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면서, 그 자리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각적 권력의 공간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다방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은 위를 향하지 않고, 앞(상대방)이나 아래(테이블)를 향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1층을 내려다보면 사람들의 표정뿐만 아니라, 읽고 있는 책들까지 보이는데, 1층에서는 겨우 그 사람의 얼굴 정도만 보일뿐이다(굳이, 다방의 기본적인 시각적 방향성에 어긋나게 고개를 젖혀 올려다본다면). 게다가 2층에서도 일직선의 통로 끝에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다가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가장 길며, 물론 그동안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그 사람이 훤히 보이기까지 한다. 침범에 대비하기 가장 최적화된 공간인데, 그만큼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또 다른 매력은 공간이 좁다는 것이다. 낮은 패브릭 소파와 테이블로 구성되어 있고, 파티션으로 좌우 공간도 제한해두었다. 게다가 층이 분리된 공간이니 천장까지 낮다. 채광도 좋지 않고 조명도 상대적으로 어둡다. 한마디로 압축된 공간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그와 나누는 대화에 몰입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침입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2층 구석진 공간이다 보니 더욱 더.
학림다방에 간다면 좁은 계단을 따라, 복도 끝의 제일 구석진 자리로 가길 추천한다.
삐걱거리는 계단, 지금은 구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클래식한 정문, 곳곳에 쓰인 의미심장한 문구, 약간은 텁텁한 냄새, 이제는 희소해서 비싸 보이는 스피커, 왠지 모르게 불편한 의자, 귀에 은은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 '굳이…' 싶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메뉴판, 언제 마지막으로 소리를 냈을지 궁금해지는 피아노, 그냥 오래됐을 것 같은 느낌의 주방 물품들. 이 모든 것들이 학림다방이 겪은 60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뿜어내는 듯했다.
우리는 먼저 4인용 테이블이지만 넷이 앉기는 비좁은(?) 1층 중앙에 자리했다. 6명이 앉기 적합해 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2인 손님을 안내하는 모습을 보고 "비효율적으로 장사한다"는 불만러 특유의 오지랖을 펼치는 순간 2층에 자리가 났다. 꽤나 폐쇄적인 복층 구조에 계속 시선이 갔던 터라 자리를 옮겼다. 낮은 계단을 올라 들어선 2층은 여러 가지로 '더' 했다. 더 넓었고, 더 어두웠고, 더 눅눅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역사의 한 사건이 시작된 건 아닐까?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였을 이 테이블에서 매캐한 담배 연기를 뿜어대며 민주 투사들이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눴을 것만 같았다.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학림다방에 온 뒤로 내 모든 생각 앞에 수사처럼 붙는 단어가 떠올랐다. '괜히'와 '왠지 모르게'. 1층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무엇이 이 공간을 특별하게 느끼게 할까? 사실 클래식, 복고 컨셉의 카페와 바(bar)는 적지 않다. 보이는 것만으로 학림다방이 특별히 다르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러했다. '괜히' 이 공간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단 하나의 이유는 '맥락'이었다. 학림다방이 학림사건 당사자들의 첫 모임 장소이며 6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맥락이 없었다면, 혹은 내가 몰랐다면 이 장소를 찾기나 했을까? 학림다방의 젊은 고객들은 정말 이 공간 자체가 좋아서 찾았을까? 그들은 이 공간을 다시 찾을까? 공간에 담긴 이야기와 맥락은 그곳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며 경험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어쩌면 '같은공간 다른생각'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일도 어떤 공간에 담긴 맥락을 소개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신촌에서 25년 동안 자리를 지켰던 향음악사가 문을 닫았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건 내가 그 곳을 자주 찾아서가 아니라, 변기 스위치가 그렇고 라이터가 그렇듯 그냥 그 자리에 있는게 당연한 것이 사라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는게 당연했던 것이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은 느껴본 사람만 안다. 무의식적으로 뻗었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학림다방에 다녀와서 실은 조금 복잡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느 정도 답을 정해놓고 학림에 갔던 것 같다. 세상에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있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나는 그런 것을 잃고 허공에 손을 휘저어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림이 향음악사 같은 곳이길 기대했다. 찾는 사람이 드물어진 지 오래여서 당장의 존폐를 걱정하기를 기대했다.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고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을 비웃기를 기대했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배경으로 남아있는 것의 귀함을 역설하기를 기대했다. 허나 학림다방은 그 귀함을 잘 알고 있을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로 함께, 아니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북적였다. 다시 말하건대 줄을 서서 입장하는 찻집은 내 생에 학림이 마지막일 것이다. 결국 무언가를 사라지게도, 남아 있게도 하는 것은 지나간 추억도 무신경한 당위들도 아닌,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일 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가 줄을 서서 기다릴 학림이 나는 좀 부럽다.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람이 찾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찾기 때문에 남는다. 매일 손을 뻗었다면 라이터도 변기 스위치도 향음악사도 예의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충열 사장님의 말처럼 학림엔 “변하지 않을 것도 있고 변해야 할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대·운동권 아닌 그가 '학림다방' 사장 된 까닭, 오마이뉴스, 2018.02.02) 변하면서 또 변하지 않으면서, 남아 있는 것들은 그렇게 제 갈 길을 가는 모양이다.
학림다방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19
전화번호 : 02-742-2877
운영시간 : 10:00~23:00 연중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