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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오 May 05. 2019

렛츠런파크 서울

같은 공간 다른 생각 #3

*2018년 10월에 방문했던 기록입니다.


[필]

경마는 로또와 다르다. 순전히 운에 맡겨야만 하는 랜덤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맞힐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그날의 날씨나 말의 컨디션 등 경기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많지만, 적어도 말과 기수의 역량이나 최근 성적 등을 공부할수록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렇다, 경마는 어느 정도 정답이 있는 게임이다. 하지만 솔직히 내게는 공부할 시간도, 그럴 흥미도 없었다.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를 찾는 게 빨랐다.


90년대생이라면 <퀴즈퀴즈>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 ‘OX 게임’을 한 번 떠올려보자. 명제가 나오면 맞으면 O, 틀리면 X쪽으로 움직여서 정답을 기다리는 게임이다. 맞히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고, 틀리면 자동으로 퇴장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OX게임을 다음과 같이 했을 것이다. 처음 4~5 문제 정도는 다수를 따라간다. 5문제 정도 풀다 보면, 문제가 어려워질수록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답이 O, 또는 X인 근거를 들며 게임을 주도하려는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서도 더 많은 주도자가 있는 쪽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 문제까지 풀어 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경마 전략은 OX게임을 할 때와 같았다. 집단지성의 장에서 적자생존 게임을 관찰하며, 중복으로 언급되는 말들을 토대로 베팅하는 것이었다. 몇 번 하다 보면 믿을 만한 주도자들을 발견할 것이고, 그들을 따라가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K’라는 사이트와 ‘G’라는 사이트의 실시간 채팅방을 번갈아 확인하며 베팅했다.


하지만 50,000원을 베팅해 34,000원을 벌었으니 결과는 실패였다. 그 이유는 집단지성이나 적자생존의 게임이 발휘될 만큼 의견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시 접속자가 1,000명이 넘었는데 말을 하는 사람은 10명 남짓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베팅을 한 5경기 동안 결과를 정확히 맞힌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방을 잘못 찾은 것일 수 있다. 더 활발히 의견을 나누는 플랫폼, 의견의 경쟁 속에서 소위 말하는 전문가가 출현하는 채팅방은 다른 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경마는 퀴즈퀴즈처럼 주도자에 기댈 수 없는 게임일 수도 있다. 두 게임 모두 정답자가 많을수록 상금이 줄어드는데 퀴즈퀴즈는 어디까지나 사이버머니고 경마는 현금이다. 게다가 퀴즈퀴즈에서 주도자가 된다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사회적 보상’이 뒤따랐다. 퀴즈퀴즈는 온라인 아바타가 곧 또 다른 자아로, 일종의 사회활동을 하는 게임이었다. 게임을 주도한다는 것은 신뢰도를 쌓는 것이며 관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경마 채팅방은 결코 이만큼의 효용이 없어 굳이 정답을 나눌 유인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채팅방을 비추하는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실시간 채팅방만 보느라 제대로 말 구경도, 사람 구경도 할 틈이 없었다. 경마장은 돈 딸 생각을 할 때보다, 경험 자체를 즐기려고 할 때가 재밌었다. 물론 경마장에서 돈 따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바깥]

어떤 계기로 새로운 세계를 만나면 그날부터 푹 빠져버린다. 영화 <타짜>에서 만난 타짜들의 세계가 그랬고, B-boy Physicx의 엘보스핀 영상이 계기가 된 한국 비보이 세계가 그랬고, 과학쿠키라는 유투버의 영상으로 눈이 뒤집힌 양자역학의 세계가 그랬다. 대체로 순식간에 활활 타오른 뒤 숯으로 변하지만, 그렇게 호기심으로 만난 새로운 세계들이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경마의 세계도 그렇게 다가왔다. 세 번째 같공다생 장소를 렛츠런파크로 정하고 구체적인 계획 수립을 위해 만난 10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회의를 하다 말고 경마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신세계였다. 드디어 영접한 1/10 밀키올리의 맛조차 따라올 수 없는 충격이었다. 복승, 복연승, 쌍승, 삼쌍승…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단어는 오랜만이었다. 엄청나게 축적된 데이터와 그 복잡함, 경마를 둘러싼 어둠의 세계까지..나는 경마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나는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한 베팅 전략을 세웠다. 마침 데이터 분석 스터디를 하고 있던 터라 욕심을 냈는데 진짜 욕심이었다. 마사회에서 제공하는 API가 동작하지 않았다(공공 데이터 포털로 시스템을 이관하는 중에 발생한 문제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데이터가 너무 많아서 크롤링하기도 어려웠다. 데이터 분석 전략을 폐기하려던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와 경마에 대한 식견이 결과적으로는 배당률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배당률과 실제 결과 간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과적합(Overfitting)을 체감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당일 오전에서야 전략을 완성할 수 있었다.


결과는 다섯 게임 중에 세 게임을 맞췄다. 총 5만 원을 베팅해서 10만 원이 좀 안되는 금액을 수령했다. 실전은 처음이라 두 게임에서 전략대로 하지 못했던 게 아쉽지만 50% 이상의 적중률에 만족한다. 원래 전략을 세울 때도 50% 적중이 목표였고, 한 번에 크게 먹는 것보다 작게 여러 번 먹는 전략이었다. 결과에 만족한다. 더 좋은 전략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쓰다 보니 빳빳한 현금으로 배당금을 수령하던 기억에 취해버렸다. 연재명이 명색이 '같은 공간 다른 생각'인데 공간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일 나의 모든 정신이 베팅에만 팔려 있었다. 그래서 렛츠런파크 자체를 잘 살피지는 못했다. 그래도 찬찬히 떠올려본다.


경마공원역에 내리면 퀴퀴한 냄새가 난다. 80%는 아저씨들인데 굳게 쓴 모자에 바람막이, 등산 바지로 구성된 패션이 대부분이다. 경마에 적합한 패션인가 보다. 간혹 젊은 커플이나 가족도 눈에 띈다. 아주 도박장 같은 분위기는 아니다. 말과 기수가 몸을 푸는 실외 예시장까지는 아주 여유로운데, 경마장 안으로 들어서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사람들의 눈이 모니터와 경주로에 집중되어 있다. 경주가 시작되면 소리가 점점 커지고, 경주가 끝나면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나오고 간혹 욕설도 들린다. 예약 좌석으로 된 2층은 가보지 못했는데 거기는 훨씬 살벌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씁쓸한 구석은 다른 데 있었다. 적어도 프로라면, 하나의 스포츠라면 관중과 선수가 상호 작용할 때 빛난다. 그런데 경마장에는 전혀 그런 교감이 없다. 경주가 시작되기 전, 기수에 대한 소개가 초대형 전광판에 나온다. 프리미어리그 중계에서 선수 소개하는 포맷처럼 멋있게 소개한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말에게도 멋진 이름이 있다. '어느멋진날', '아델의꿈', '뷰티풀아시아', '제주의하늘' 등 감성 터지는 이름이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말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마번으로만 남는다. 내가 그랬다. 배당률 패턴으로 베팅 전략을 세운 순간부터 기수와 말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베팅한 말과 기수가 누군지 아직도 모른다. 경주를 위해 그들이 흘렸을 땀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경주가 끝난다. 순위가 정해진다. 누군가는 상금을 타고 누군가는 그냥 돌아간다. 누군가는 배당금을 받고 누군가는 돈을 잃는다.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지만 남는 건 저 현상의 반복뿐이다. 경마장에서는 시간이 무척 빨리 간다. 대략 30분마다 경주가 있는데 그 시간이 굉장히 타이트하게 흘러 간다. 그렇지만 공허하다. 이야기가 생겨나고 남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


*수익금은 테오 운영비에 보탰습니다. 이 사실을 꼭 알리고 싶네요.

**혹시 주말에 경마장에서 저를 보신다면 모른 척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희정]

경마장에 갔던 날은 일요일이었다. 월요일에 출근하자 회사 동료들은 내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남들이 느낄 정도로 얼굴이 밝아 보인 걸 보면 그날 정말 엔돌핀이 몸에 돌기라도 했나 보다. 결론적으로 돈은 못 벌었다. 오만 원을 베팅했는데, 단 한 판에서 삼만 오천 원을 획득하여 만 오천 원의 손해가 났다. 그런데 오히려 낯빛이 밝아졌다니 돈을 벌고 온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본디 새로운 자극, 그로부터 오는 짜릿함과 재미를 지향하는 나에게 경마장은 신세계였다. 첫 번째 마주한 새로운 자극은 경마공원 역에서 구매한 천 원짜리 책자였다. 가판대에서 천 원을 내면 말이 그려진 커다란 책자와 컴퓨터용 사인펜을 준다. 마치 자격증 시험을 보러 들어가는 교문 앞에서 컴싸와 시계를 파는 광경과 유사한 느낌이다. 책자를 펼치면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정보값들이 빼곡하다. 오늘 있는 경기 시간에서부터 출전하는 말들의 이름, 말들의 최근 경기 기록까지. 그뿐만이 아니다. 아마도 경기 분석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예상한 각 경기별 예상 순위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책자 안에 때려 박다 보니 바로 그 정보를 해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날 나는 세 번째 경기까지 그 책자에 코를 박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뭐 하나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하면서도, 머릿속은 다른 누구보다 복잡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자극은 드넓은 경기장 위에 놓인 거대한 스크린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사람들의 베팅에 따른 배당률을 스크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앞서 말한 그 책자에 코를 박고 있느라 초반에는 그 스크린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베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머리 굴림이 반영된, 어쩌면 가장 믿음직한 정보가 그 스크린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세 경기 정도가 걸렸다.


경기가 시작되면 말들이 저마다 출발하고, 우리의 눈앞에서 빠르게 사라진 말들이 뛰는 모습은 스크린을 통해 실시간 중계된다. 스크린은 가로로 주욱 길어서, 마치 말들이 아직 내 눈앞에 있는 느낌이 든다. 스크린의 화질도 놀랍고, 순간순간 집계되는 그들의 순위 변경을 보여주는 방식도 꽤 촘촘하다. 내가 베팅하지 않은, 심지어 내가 샀던 책자에서는 언급되지도 않은 말이 3위 안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아, 왜 10번이 들어오고 난리야,라고 했다가 옆 아저씨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본인의 책자를 가리켰는데, 그 책자에서는 10번 말이 언급되고 있었다.(그쯤 되니 책자를 만드는 저마다의 주체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경마장이라 하면 꾸리꾸리하고 죄다 어두울 것만 같았던 내 편견을 바꾸어준, 꽤나 쾌적한 환경의 경마장은 세 번째 자극이었다. 경마장에 있는 두 시간 동안 어느 불쾌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쾌적했다. 다만 이것이 정말 경마장이 쾌적해서였는지, 내가 책자에 코를 박고 있느라 경마장을 미처 둘러보지 않아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공간 자체를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서는 한 번 더 가야 하는데...(말잇못)


경마장을 나서면서 솔직히 아쉬웠다. 처음부터 책자가 아닌 스크린의 배당률에 좀만 더 주목했다면 돈을 잃지는 않았을 텐데. 한 번만 더 오면 왠지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경마장에서 나와 잡아탄 택시에서 아저씨의 진지한 조언을 듣기 전까지는. “여기 절대로 다시 올 생각하지 말아요.”


그래도 까놓고 말해, 이 정도로 새로운 자극을 맛보는 데에 단돈 만 오천 원 밖에 들지 않았으니 충분히 이득 아니었나. 게다가 평소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얼굴 좋아 보인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이만하면 돈 벌었다, 벌었어.


*창구에 가서 베팅에 성공한 종이를 내면 딴 돈을 현금으로 받을 수 있다. 분명 돈을 잃었는데도 삼만 오천 원을 딴 것만 같은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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