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밥의 동면
그래요, 사랑이었어요 < 4>
이곳 땅끝순례문학관 뜰에는 정원이 있어 여러 꽃이 피고 집니다. 제가 있는 동안 꽃양귀비와 장미, 수국들이 피고 졌고 이제 백일홍이 만개했지요. 백일홍은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무색하게 100일 정도 되는 긴 시간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일까요. 다른 꽃을 볼 때면 미리 질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백일홍을 볼 때만은 짐짓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문학관 뜰에 백일홍 말고도 활짝 핀 꽃이 더 있습니다. 작은 연못의 수련이죠. 연못에 있는 물고기들의 근황이 궁금해 가보았는데 수련이 활짝 펴있었습니다. 수련은 꽃도 꽃이지만 잎의 형태가 참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수련을 보는데 왜 뜬금없이 개구리밥이 떠오른 걸까요.
아마도 근래 읽었던 식물학책에서 개구리밥에 관한 내용을 인상 깊게 본 탓인가 봅니다. 수련이 정원의 호수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수생식물이라면 개구리밥은 논을 비롯해 물이 고여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유식물이에요.
흔한 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고는 하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특히 생태계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두루 분포해 있다는 건 그만큼 세상살이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작고 흔해 빠진 개구리밥에게는 어떤 생존전략이 있는 걸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개구리밥이 겨울을 나는 방법입니다. 엄청난 번식력으로 논과 연못을 뒤덮던 개구리밥은 추수가 시작될 무렵이면 더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명색이 수생식물인데 물이 사라지면 어떡하려나. 개구리밥은 긴 동면에 들어갑니다.
씨앗 같은 겨울눈을 만들어 동면하는데 그 과정에서 체내 녹말을 늘리고 밀도를 높여 공기를 제거한다고 합니다. 몸집에는 변화가 없지만 체중이 늘어나는 셈이지요. 개구리밥은 물속에 가라앉아 겨울을 납니다.
개구리밥이 종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그 자체로도 경이롭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과학적인 설명을 떠나서 개구리밥이 자신을 물속으로 가라앉히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일렁입니다. 건조해진 땅에서, 눈 덮인 땅에서 따뜻한 물의 기억만으로 인고하는 이 작은 부유식물의 삶을 헤아려보려니 멀미가 날 것 같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삶이 한 번 뿐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의 삶에는 여러 주기가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우리가 되는지도 모릅니다.
개구리밥이 다시 수면으로 떠오를 날을 믿으며 자기 스스로 수장시키는 식물임을 책을 통해 알았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습니다. 직접 관찰해서 알았더라면 그 순간 얼마나 큰 환희를 맛보았을까요. 이렇듯 저는 얼마나 많은 개구리밥 같은 존재들을 놓치고 살아온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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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개구리밥도 드물게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꽃이라네요. 그러니 그 많은 개구리밥을 보고도 꽃을 본 기억은 없을 수밖에 없지요. 평소 쥐눈이콩보다 작은 꽃들을 좋아해 길가에 웅크려 앉고는 하는데 앞으로 개구리밥을 보러 갈 때면 돋보기를 챙겨야겠습니다.
* 언젠가 제게서 “참, 개구리밥 같은 사람이네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그건 더할 수 없는 존경의 표현임을 알아주시길.
* 위에서 언급한 식물학책은 신혜우 작가님의 <식물학자의 노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