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사랑이었어요 <5>
그래요, 사랑이었어요 <4>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는 매우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소설이다. 프리메이슨 신봉자인 아버지 디디에는 어린 딸을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환경에서 키운다. 그는 자기만의 왕국에서 자녀를 기르기 위해 아이가 생기기도 전부터 계획적으로 움직였다. 가난한 광부의 딸을 아내로 삼기 위해 돈을 주고 산 뒤 기숙학교에서 엄격하게 교육받게 한다. 그렇게 학사학위까지 마친 아내를 임신시키고 자신이 지정한 날에 출산하게 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이 소설의 주인공 모드다.
디디에는 세상을 불신한다. 오로지 자신만 믿는다. 그에게 바깥세상은 악의 소굴이다. 그래서 딸 모드가 극한의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특별훈련을 시킨다. 어릴 때부터 술을 먹인 뒤 똑바로 걷게 하거나, 공중제비를 시키고, 지하실에 가둬 엄습하는 죽음과 마주하게 하는가 하면, 전기가 흐르는 철책을 만지게도 한다.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더 놀랄 일이 남았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스릴러나 공포물이 아니다. 작가의 이름과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이 힌트랄까. 그렇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이토록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란 모드에게도 친구들이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이다. 당나귀 같은 가축이 모드의 유일한 친구이자 안식처였다. 이 소설에는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모드는 아버지의 폭압적인 훈육을 견디고 음악 선생님 몰랭의 도움을 받아 집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에 앞서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건 가축 친구들이었다.
나는 합평 당시 소설에 동물 좀 그만 등장시키라는 지적을 받고는 했다. 내 무의식에는 사람만큼이나 동물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모드 쥘리앵에 비할 건 아니지만 나 역시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유년기를 보냈다. 그럴 때면 집에서 기르던 동물들에게 받은 위로가 컸다. 내 감정을 투사한 것이겠지만 그 동물들이 내 마음을 알고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았다.
이런 기억들 때문일까. 나는 동물이 애틋하다. 반려동물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혐오하는 동물조차 대체로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내게 산자락에 자리한 땅끝순례문학관은 내가 지내던 강변과는 자연환경이 다른, 그래서 새로운 동물들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드는 곳이었다.
해남에서 머무는 동안 내 휴대폰에는 다양한 동물 사진들이 쌓였다. 화사와 까치살무사를 비롯한 여러 종의 뱀, 야간산책 때 앞을 막아서던 떡두꺼비, 문학관 연못의 붕어와 그 붕어를 잡아먹는 왜가리,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 꽃등에와 호박벌, 처마에서 떨어졌는지 아직 날지 못하는 새끼 박새들과 위풍당당한 맹금류, 본의 아니게 풀숲에서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하고 저도 놀라던 고라니에 이르기까지. 그렇다고 문학관이 사파리라는 건 아니니 겁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일부러 동물들을 찾아다닌 면도 없잖아 있다.
해남에서 본 동물 중 가장 내 눈길이 오래 머문 건 나방이었다. 나방은 어릴 적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은 대표적인 곤충이다. 내가 자란 시골집 담장에 가로등이 설치되면서부터일 거다. 여름철이면 내 방의 창문에는 빛에 이끌린 나방들이 붙어 있었고 그 나방을 포식하기 위한 청개구리들 또한 창문을 기어오르고는 했다. 그러니까 이때는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청개구리가 나방 사냥에 성공하느냐를 구경하는데 골몰해 있었다. 주인공은 청개구리였고 나방은 조연쯤이었다. 나방이 주인공으로 격상된 건 밤이 친근해지면서부터일 거다.
나는 왠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활동하는 나방이 나비보다 솔직해 보였다. 그건 앉을 때 날개를 접지 않는 당당한 모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척을 느끼고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는 우직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흔히 나방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부나방. 본래 나방의 한 종을 일컫는 이 명사는 불빛을 향해, 어둠의 틈새를 향해 달려드는 나방을 뜻하는 대명사가 됐다. 타 죽을 줄 알면서도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의 습성을 인간적인 잣대로 해석하면 무모함이다. 욕망과 충동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인간의 일면을 투영한 것이다.
나는 부나방의 습성을 부나방의 입장에서 재해석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가로등 주위를 허우적거리다 지쳐서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부나방을 볼 때면 허무하기보다는 뭉클했다. 가슴이 이는 이 멀미를 단순히 슬픔이라 말하긴 부족했다. 오히려 성화(聖畫)를 볼 때처럼 신성한 기분에 가까웠다. 왜일까. 때론 감정이 먼저 일고 이유를 뒤에 찾기도 한다.
밤에 활동하는 나방은 왜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걸까. 불빛을 좋아한다면 낮에 활동하면 될 게 아닌가. 나방에게 있어 어둠 속 불빛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다 보니 네덜란드 둑 소년 이야기가 생각났다. 둑에 난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아 나라가 물에 잠기는 재난을 막았다는 이야기. 어쩌면 나방에게 있어 불빛은 둑에 난 구멍 같은 게 아닐까.
나방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보다 길 테고, 당연히 전구의 역사보다도 길다. 나방에게 밤의 어둠은 낮의 태양처럼 당연한 이치일 텐데 언제부턴가 그 당연한 이치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문명이 밤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나방은 그 밤의 구멍을 막아야 했다. 이 하찮은 시도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타조나 닭처럼 날개가 있으나 날지 못하는 나방이 있다. 날개가 있으니 본래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인해 날지 못하게 된 나방이 있으니 바로 누에나방이다. 우리가 간식 삼아 먹는 번데기의 성충 말이다. 누에나방은 본래 날 수 있었으나 명주실을 얻기 위해 양식이 되면서 날개가 퇴화했다고 한다. 따라서 누에나방은 밤의 구멍을 막을 능력이 없다.
소설을 쓰다, 소설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나방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낮의 이야기가 아니라 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소설을 쓴다. 되도록 양지가 아닌 음지를 떠올리며 글을 쓰려고 한다. 익숙한 아름다움이 아닌 낯선 아름다움을, 차오르는 슬픔이 아니라 묻어둔 슬픔을 말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린다. 그래서일까. 내 눈에는 화려한 나비보다 밤의 상처를 메우기 위해 날개 접는 법을 잊어버린 나방이 더 아름답다.
한때 새벽에 글을 쓰다 보니 올빼미족이란 말을 듣고는 했다. 하지만 나방족이란 표현이 더 근사하게 들린다. 밤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밤을 어루만지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어둠에 가려졌으되 엄연히 존재하는 실제를, 낮이 침범하지 못하는 밤을 노래하는 이 타락한 정령은 지나간 사랑의 기억을 불러내기도 한다. 연인의 짧은 속삭임에 환희로 가득했던 순간들이, 그녀들의 언어를 해독하지 못했을 때의 아득함을 싣고 온다. 함께여서 더 예리해진 외로움을 안고 롤러코스터를 타던 날들. 이별인 줄 몰랐던 이별에서 타락하는 나를 느끼며 침통하던 지난한 밤이면 나방의 밤을 훔쳐 보고는 했다.
이들은 밤의 슬픔을 이해하고, 우울의 기저를 탐색할 줄 알며, 낮의 원색에 가려진 무채색으로 자기를 표현할 줄 안다. 그래서 타락했을망정 밤을 안고 건널 수 있다. 어찌 이 몽상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