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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Mar 14.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 그림일기

차를 그려본 건 두번째이다. 첫번째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 나왔던 허드슨이었는데, 우연찮게도 그 역시 빨간 차였다. 다만 그 차는 무척이나 클래식하고 우아한 모양새였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 나오는 '마이 카'의 앙증맞은 외양과는 달리.

귀여운 차는 그 주인과 미스매칭이면서도 미묘하게 어울리는 구석이 있다. 눈에 띠게 붉은 색상과 조금 작은 사이즈가 주는 첫인상은 점잖고 키 큰 성인 남성 그닥 좋은 조합으로 보이지 않지만, 오랫동안 타온 차임에도 깨끗하고 잘 길들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점은 조심성 있고 차분한 주인을 둔 차 답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 빨간 차의 주인 가후쿠와, 빨간 차를 대신 운전해주는 미사키의 이야기이다.


줄거리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가후쿠는 드라마 작가인 아내를 무척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연극제 심사를 위하여 출장길에 올랐던 날, 비행시간이 연기되며 집으로 돌아 왔다가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만다. 상대는 아내의 작품에 출연한 젊은 남자 배우. 이후 가후쿠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만 아내에게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 평화로운 나날을 이어가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아내가 말한다. "할 얘기가 있어. 일찍 들어와 줄 수 있을까?" 그날 가후쿠는 아내가 할 이야기가 듣기 두려워 한참을 밤거리를 헤매이다 늦은 귀가를 하고, 그 사이 아내는 뇌졸중을 일으켜 사망하고 만다.


이후 가후쿠는 한 연극제에서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연출을 맡게 되며 후쿠시마로 떠난다. 두달 간의 준비기간동안 연극제 측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로 가후쿠에게 운전기사를 소개하고, 처음엔 마뜩치 않아 했던 가후쿠는 미사키의 운전솜씨에 설득당하여 그녀의 운전으로 출퇴근을 함께 하며 연극을 무대에 올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1.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척 잔잔하고 러닝타임이 길기 때문에 보아내기 쉬운 작품이 아니다. 다만 내게는 전작인 아사코보다 집중도 있게 볼 수 있었고, 감정적으로도 훨씬 위로가 된 부분이 있어 마음에 오래 남았다.


2.

아름다운 장면들이 무척 많았는데, 아내가 첫사랑에 빠진 소녀 이야기를 들려주는 몽환적인 영화의 시작부와, 타카츠키(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배우이자, 가후쿠의 연극에서 '바냐' 역을 맡은 배우)가 차 안에서 아내가 들려주지 못했던 후반부 스토리를 이야기해주는 장면, 그로 부터 이어지는 가후쿠와 미사키가 차 안에서 루프로 손을 뻗어 담배를 피는 장면 등등은 이미지적으로도 너무 아름다웠다. 소냐의 수화로 완성되는 연극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3.

다만, 후반부의 홋카이도 여행은 극이 가장 고조되어야 할 부분임에도 개인적으론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나누는 대사가 지나치게 연극적으로 들렸고, 두 배우의 연기도 작위적이게 느껴졌다. 마치 '배우들간에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로 가후쿠의 연극 무대에 올려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4.

이 영화가 얼마나 영화언어로 잘 짜여져 있든, 또는 온갖 상징을 품고 있든, 결국 나에게 이 영화는 치유의 여정에 대한 것이며, 응겨져 있던 마음의 해소에 대한 것이, 들어야만 하는 것와 말해져야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찌보면 이 한 편의 영화는 세상에 들려지지 못한 것들과 세상으로 말해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일종의 한풀이 제식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긴 영화적 의식의 끝에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묻혀있던, 묵어있던 어떤 말들이 담뱃불을 제향삼아 저 공중으로 자유롭게 풀려 나가는 듯 했다.




다시 돌아와 이 작고 길이 잘 든 빨간 차는 어떻게 되냐하면, 이 차는 가후쿠를 떠나 미사키에게로,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미사키는 더이상 남을 위해 운전하지 않고, 누구보다 조용하게 운전하며 자기 존재를 숨겨야 할 필요가 없으며, 커다란 강아지와 함께 자신이 요리할 식료품을 싣고 달린다. 조금 덜 조용할 자유가 주어졌고, 죽어있는 목소리가 아닌 생기있는 소음들을 들을 수 있게 된 셈이니 이 빨간 차에게도, 미사키에게도 해피엔딩인 셈. 둘은 아마도 오래도록 좋은 콤비가 될 것 같아 보여 안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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