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포스터만 봐도 아, 나 이 영화 사랑하겠구나- 감이 오기도 한다. 아주 간만에 그런 영화를 만났다. <성적표의 김민영>이다.
학창시절 우리의 시계는 같은 박자로 흘러가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나와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 모두 인생의 같은 계단에 함께 서 있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관문을 넘었고, 또 비슷한 관문을 앞에 둔 사이였다. 꽤 오랜 시간 그렇게 같은 박자에 맞춰 지내다보면 언제까지나 우리가 비슷한 시간대를 살아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만다. 아주 흔한 오해이다.
그러나 나와 너의 시계가 제각기 다른 시각을 가리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대개 성인이 된 직후 1~2년 사이면 '학창시절을 함께 한 우리의 단단한 우정'이란 환상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10대의 우리가 고이 간직하고 지켜온 우정이란 것이 사실은 얼마나 특수한 상황 속에서나 가능하던 것이었는지,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서운해하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꺄르륵 웃어댈 수 있었던 그 시기는 몇 개의 시간대가 아주 우연히 겹쳐있던 기적적이고 짧은 우연이었다는 사실을.
<성적표의 김민영>은 바로 이 미묘한 시기를 세심하게 포착해 낸 작품이다. 삼행시 클럽 따위의, 도무지 소용이라곤 없는 클럽을 만들어 놓고는 그저 함께 즐겁다는 이유만으로 괜찮을 수 있었던 세 친구가 있다. 정희, 민영, 수산나가 그들이다. 고등학교 친구인 세 사람은 곧 다가올 수능을 앞두고 경건하게 삼행시 클럽 해체를 선언한다. 물론 이건 잠시만 안녕이다. 수능이 끝나고 어른이 되면 우린 다시 말도 안되는, 혹은 가끔은 아까우리만치 번뜩이는 삼행시를 서로에게 읊어주며 또다시 깔깔댈 수 있을테니까.
그러나 정작 수능이 끝나자 성인이 된 세 사람은 더이상 삼행시 클럽이 재밌지 않아졌음을 느끼게 된다. D-day의 압박도, 학교라는 공간, 학생이란 제약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전보다 더 즐거울 수 없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동네 테니스장에서 알바를 시작한 정희, 연고가 없는 한 지방 대학에 진학한 민영, 그리고 해외 명문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 수산나. 뿔뿔이 흩어진 세 친구는 그 공간적 거리만큼이나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 건지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한다. 미래로의 전진을 잠시 유보해둔 정희는 예전같지 않은 친구들이 낯설다. 어쩐지 정희 홀로 10대의 시간 속에 남겨지고 두 친구는 그 시절과는 단절된 어른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만 같다.
그러다 여름방학은 맞이한 민영이 간만에 정희를 집으로 초대한다. 잔뜩 기대에 부푼 정희는 캐리어에 온갖 짐을 싣고 민영의 집 앞에 도착하지만, 어쩐지 민영의 반응은 뚱하기만 하다. 알고보니 하필 그날은 민영의 1학기 성적 발표날. C가 난무한 성적표에 낙담한 민영이 여러 교수님들께 성적 정정을 부탁드리느라 바쁜 사이, 정희는 마음껏 서운해하지도 못한 채 민영을 곁에서 지켜만 볼 뿐이다.
두 사람은 과연 예전같은 우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많이도 서운했던, 그러나 미묘해진 관계 속에 서운하다 표현도 다 하지 못했던 스무살, 혹은 그 무렵의 당신은 어쩌면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씁쓸한 관계를 다룬 영화가 그럼에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희가 민영에게 남긴 성적표처럼 응원의 마음이 가득 눌러 담겨있기 때문이다. 더이상 서로의 인생이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 않아 멀어져 버렸더라도, 어느 순간을 함께했던 누군가가 마음 속에 나에 대한 애정어린 응원을 품고 있을 거란 상상만으로도 어쩐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 나 역시, 나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이제는 더이상 연락하지 않는 그들을 마음 속으로 작게 응원해보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