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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Jun 14. 2017

흔들리는 소녀의 세계

용순(2017)

용 용(龍) 순할 순(順), 용순. 엄마가 용 쓰면서 낳아 그리 이름 붙였단다. 이 촌스런 이름의 소녀(이수경)는 지금 사랑에 빠져 있다. 상대는 육상부 담당 체육 선생님(박근록, 이하 체육). 이 사랑은 운명이다. 단짝 친구인 문희(장햇살)는 영 못마땅해 하지만 사랑에 빠진 소녀의 귀에 들릴 리 없다. 그런 용순을 짝사랑하는 동네 친구 빡큐(김동영)는 닿지 못하는 마음을 시(詩)로 풀어내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아무래도 체육이 바람이 난 것 같다. 상대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순순히 헤어져 줄 마음은 없다. 내가 먼저 좋아했고 내가 먼저 만났으니 체육은 내꺼다.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는데 설상가상으로 집구석도 말썽이다. 어느 날 집에 왔더니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알 수 없는 몽골 여자 한 명이 앉아 있는거다. 아빠는 '새엄마'라 부르란다. 도대체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열여덟 용순의 여름은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리는 걸까?




한 소녀의 성장담을 코미디와 버무려낸 <용순>을 보고나면 두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우선 2008년의 문제작 <미쓰 홍당무>다. 선생님과 학생이 엮인 독특한 코미디극 <미쓰 홍당무>는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캐릭터와 전개로 이목을 사로잡았다.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는 양미숙(공효진)은 서종철 선생님(이종혁)을 짝사랑 중이다. 도끼병이 있는 미숙은 이미 서 선생님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예쁘고 매력적인 교사 이유리(황우슬혜)가 라이벌로 등장하며 미숙은 폭주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종철의 딸이자 전교 왕따인 종희(서우)가 가담하며 이 소동은 막장으로 치닫는다. <미쓰홍당무>의 절정은 모든 인물이 한 교실에 모여 감정을 폭발시키는 부분이다. <용순>의 클라이막스와 유사하다.


대망의 육상 대회 날, 용순은 체육과의 관계도, 부모님과의 관계도 최악이다. 그런 용순을 약이라도 올리듯 문제적 두 여자, 바람녀와 새엄마가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고 용순과 울분이 머리 끝까지 치솟은 상태로 그 현장을 덮친다. 여기에 사건의 중심 체육까지 소환되며 현장은 아비규환이 된다. 나이 떼고 계급 떼고 온 힘을 다해 서로에게 달려든 두 여자의 혈투에는 정말이지 내일이 없다.


출처 : 다음 영화


그렇다면 용순은 왜 머리 끄덩이를 잡아야만 했을까.


여기서 떠오르는 또 다른 영화 <머드>가 있다. 제프 니콜스 감독의 2013년작 <머드>는 열네 살 소년 엘리스(타이 쉐리던)가 우연히 미시시피강 무인도에 숨어 사는 남자 머드(매튜 맥커너히)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소년은 혼란스럽다. 부모님은 이혼을 이야기 중이다. 사랑해서 결혼했을텐데 어떻게 이혼을 생각할 수 있나. 때마침 상급생 소녀 메이에게 한 눈에 반해 열렬한 풋사랑에 빠진 소년에게 '사랑의 끝'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엘리스가 머드를 돕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머드는 사랑하는 여인 주니퍼(리즈 위더스푼)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중인 범죄자다. 그러나 엘리스에게 머드가 살인자란 사실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사랑이다. 엘리스는 진심으로 머드와 주니퍼가 재회해 해피 엔딩에 이르길 바란다. 소년이 착하고 순수해서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년이 믿고 있는 세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용순 역시 마찬가지다. 용순의 트라우마는 어린 시절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후 옛 연인과 함께 떠나버린 어머니다. 옷자락이라도 붙잡아 볼걸 그러지 못했다. 아빠와 딸은 버려졌다. 사랑하면서도 잡지 않았던 아빠가 용순은 원망스럽다. 그래서 이 사랑을 놓칠 수가 없다. 아빠처럼 그렇게 순순히 보내주어선 안된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이 열여덟 소녀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 용순이 체육과 헤어질 수 없는 것은 단순히 그를 사랑해서만이 아니다. 사랑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은 용순의 믿음에 어긋난다. 믿음이 깨어지면 세계가 무너진다. 그래서 용순은 필사적이다.


출처 : 다음 영화


엄마와 마지막으로 계곡에서 놀던 날, 용순은 그림이 그려진 돌멩이를 계곡물에 휘익 던진다. 용순이 던진 돌을 찾던 엄마는 비슷한 돌멩이 하나를 가져다주며 찾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물에 그림이 다 지워져 버렸다고. 용순에게 이것은 거짓말이다.


파란만장한 소동극이 마무리되고 용순은 취미삼아 조약돌에 그렸던 그림들을 물파스로 지우기 시작한다. 예쁘게 그려 간직하기도 하고 선생님께 선물도 드리고 싶었다. 사랑의 상징이자 변치 않을 것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림은 깨끗하게 지워진다. 엄마에게도 그랬었나 보다.


소녀의 세계는 흔들리고 무너지며 또다른 계절을 맞이한다.

가을이 오고 있다.


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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